항목 ID | GC005001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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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珍島金甲鎭城 |
영어음역 | Jindo Geumgapjinseong |
영어의미역 | Geumgapjinseong Fortress in Jindo |
이칭/별칭 | 금갑도진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금갑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승필 |
문화재 지정 일시 | 2005년 7월 13일 - 진도 금갑진성 전라남도 기념물 제234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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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진도 금갑진성 전라남도 기념물 재지정 |
성격 | 수군진성 |
양식 | 석성 |
건립시기/연도 | 1485년(성종 16)~1499년(연산군 5)[추정] |
구성 | 성곽, 치성, 해자, 동·서 2개의 성문, 성 내부에 객사, 아사(衙舍), 내아(內衙), 한문루(閑門樓), 운고(運庫), 장청(將廳), 사령청(使令廳), 군기화약고(軍器火藥庫), 진무청(鎭務廳) 등의 건물이 있었으며 성 밖에 인접하여 선창(船倉)이 있었음 |
높이 | 약 11자 |
길이 | 약 1,050자 |
둘레 | 약 1,050자 |
소재지 주소 |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금갑리 |
문화재 지정 번호 | 전라남도 기념물 |
[정의]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금갑리에 위치한 조선시대의 수군진(陣).
[개설]
금갑진성은 조선시대 남해와 서해를 잇는 주요 해상교통로에 위치하였으며, 왜구를 막는 전략상의 요충지로 조선 수군만호가 지휘하는 수군진이 설치되어 있었다. 성벽은 돌로 쌓은 석성이며, 축조된 시기는 1485년에서 1499년 사이로 추정된다. 현재 잔존하고 있는 성곽은 성의 서측부와 북측부이다. 2005년 7월 13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234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전라남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건립경위]
금갑진이 위치한 진도는 남해와 서해를 잇는 해상교통로에 위치하여 한반도의 연안항로와 중국 및 일본을 연결하는 군사 및 교역로의 주요한 길목이었다. 고려 후기에 들어와 여러 차례 왜구의 침략을 받으면서 진도에 수군진이 설치되었고, 세종 28년 무렵에는 금갑도진에 수군만호가 상주하였던 것으로 문헌 조사에서 밝혀졌다. 세조 때에는 금갑도진의 방어 거점으로서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군비를 강화하는 조처가 취해져 금갑진의 선군은 130명에서 291명으로 증원되었다. 금갑진성이 언제 축성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1485년(성종 16)에서 1499(연산군 5) 사이에 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금갑진은 다른 수군진에 비하면 크지 않았지만 보유 병선의 수는 12척으로 다른 수군진보다 많았다(경국대전).
『세종실록지리지』에 보이는 수군 편제는 여러 차례 변동이 있었는데 전국적으로 수군 편제가 통일된 것은 1457년(세조 3) 진관체제가 갖추어지면서 완성되어 『건국대전』에 등재되어 법제화되었다. 이에 의하면 전라도 수군은 전라 좌수영과 우수영의 2개의 주진으로 편재되어 있었는데, 좌도의 거진(巨鎭)은 사도에, 우도의 거진은 임치진에 두었다. 금갑진은 우수영에 속하였으며 거진인 임치진의 속진으로 수군만호가 지휘하였다. 전라도의 수군 편제는 1522년(중종 17)에 왜구가 추자도에 침입한 것을 전후하여 왜구의 침입이 빈번해지자 완도에 가리포진을 설치하고 첨사를 배치하면서 변화를 겪었다. 이때에 금갑진은 임치진의 속진에서 가리포진의 속진이 되었다. 이후 금갑진은 1894년 갑오개혁 당시 군사제도 개혁의 일환으로 각 군영의 통폐합이 이루어지면서 다른 수군진들과 함께 폐진되었다.
[위치]
전라남도 진도의 남동쪽 끝에 있는 의신면 금갑리 해안에 위치하며 접도와의 사이에 수로가 발달하여 있다. 진도군 진도읍에서 남쪽으로 의신면 면소재지가 있는 돈지리까지 와서 18번 일반국도를 따라 계속 남쪽으로 가면 금갑리 해안도로의 입구에 다다른다.
[형태]
중종 때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진도 금갑진성에 대하여 “석축으로 둘레 1,153자, 높이 8자, 샘 1이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문화유적총람』에 금갑진은 성 주위 315m, 높이 3.3m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성의 규모는 1,050자, 높이 11자 정도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석루(石壘)가 약 5칸이 되는 곳에 깊이 4자 내지 10자, 폭 약 3칸의 해자로 생각되는 것이 있다.”고 보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해자가 갖추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남아있는 『금갑진지도』에는 동·서 2개의 성문이 표시되어 있고 성 내부에 객사, 아사(衙舍), 내아(內衙), 한문루(閑門樓), 운고(運庫), 장청(將廳), 사령청(使令廳), 군기화약고(軍器火藥庫), 진무청(鎭務廳) 등의 건물이 있었으며 성 밖에 인접하여 선창(船倉)이 있었다. 관원으로는 만호 1명과 군관 13명, 이(吏) 11명, 지인 3명, 사령 8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현황]
접도와 금갑리 해안 사이에 형성된 수로를 마주하는 낮은 산지에 금갑진이 있으며 진도 금갑진성은 성의 존재를 은폐하기 유리한 지형을 활용하여 입지하면서 자연지형의 험준함을 살려 성곽을 축조함으로써 방어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또한 금갑진성의 바로 앞에 위치한 접도는 금갑리와 연결되어 있고, 주변이 청정수역인 데다 천연수림과 쪽빛 바다가 어우러져 수려한 자연경관을 갖추고 있다.
현재는 금갑진성의 대부분이 훼철된 상태이며 흔적만 확인되는 성의 북측 성벽과 서측 성벽의 일부가 남아 있다. 현재 가장 양호하게 보전된 부분은 북측 성벽으로, 길이 약 25m, 높이 3.5m 정도로 마을 주민의 집 담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금갑진지도』에 나타나는 건물 중 현존하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4기의 만호비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