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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전마을 동제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500331
한자 竹田-洞祭
영어음역 Jukjeon Maeul Dongje
영어의미역 Jukjeon Village Tutelary Festival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의례/제
지역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
집필자 나경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마을신앙
의례시기/일시 음력 정월 대보름
의례장소 마을 앞
제관 마을사람들

[정의]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 죽전마을에서 매년 정월 대보름에 모시는 마을제사.

[개설]

본래 진도군 군일면에 속한 지역으로서 지형이 사슴의 뿔처럼 생겼다 해서 녹진(鹿津)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죽전리, 대사리, 신동리 일부를 병합하여 녹진리라 불리면서 군내면에 편입되었다. 울돌목, 망금산, 노적봉 등의 고적이 있어서 유명하다.

죽전마을에는 1400년대 말 능선구씨가 입향하였다고 전해지나 사실적 근거는 찾기 어렵다. 그 후에 김해김씨, 밀양박씨, 무안박씨, 원주이씨 등의 다양한 씨족들이 모여 살면서 현재에 이르렀다. 지금은 밀양박씨의 선산이 있는 곳이지만, 마을에 수백 년 된 고목들이 즐비한 것으로 보아 꽤 이른 시기에 마을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죽전마을에서 사람이 가장 많이 살 때는 120호에 이르렀으나 현재는 78호가 살고 있다. 주민들의 주요 소득원은 쌀과 월동배추, 대파이다. 현재 주요 성씨는 무안박씨, 원주이씨, 문의박씨 등이다.

마을 공동재산으로 마을회관과 마을 공동창고, 저수지 1, 2, 3호가 있다. 마을조직으로는 55세 미만의 사람으로 구성된, 회원 30여 명의 청년회, 마을의 전 부녀자가 참여하는 부녀회, 65세 이상의 노인 약 70여 명으로 구성된 노인회, 마을 전 주민이 참여하는 상두계가 있다.

[연원]

죽전마을에서 모시는 동제는 두 가지다. 하나는 정월 대보름에 모시는 거리제이며, 다른 하나는 음력 6일 1일에 산에 올라가 모시는 충제이다. 충제는 산제, 또는 산신제라고도 불렀다. 현재는 거리제만 모시고 충제는 1960년대 후반에 없어져 지금은 모시지 않고 있다.

이 마을에서 거리제는 1964년 아니면 1965년에 다시 시작되었다. 충제만 모셔오다가 거리제를 모시게 된 것이다.

오래 전에 없어졌던 거리제를 다시 모시게 된 것은 계기는 다음과 같다. 1961년 1월 1일 마을 사람끼리 싸움이 나서 한 사람이 죽었다. 이 일은 마을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러다 농약이 생기면서 농약을 먹고 죽은 사람도 생기고 농약을 잘못 먹어 죽은 사람이 생기는 등 마을에 고민이 많아졌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어떤 노인이 마을을 지나면서 이 마을은 거리제를 모시지 않으면 사고와 사건이 많이 나겠다는 말을 흘리고 지나갔다. 이 말을 들은 사람이 이장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그 노인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장은 마을사람들과 상의한 끝에 거리제를 새로 모시기로 하였다. 처음에는 마을 앞 낮은 구릉의 ‘알매산’ 숲 속에서 거리제를 모셨다. 예전에 거리제를 모시던 곳은 마을 바깥쪽 목고실나무가 서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거리가 너무 멀어 알매산에서 모시기로 한 것이었다.

오래 전의 일이지만 나병환자들 10여 명이 이 마을에 들어와 알매산에 움막을 짓고 살았다고 한다. 이에 마을 청년들이 나서서 그 사람들을 다른 곳으로 보냈다. 이 일을 상기시킨 마을사람들은 어차피 얻어먹고 다니는 귀신들을 위해 거리제를 모시는 것이므로 나병환자들이 얻어먹고 살았던 알매산에서 제사를 모시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모아졌다고 한다.

그러나 겨울철 날이 궂으면 너무 춥고, 또 밭을 지날 때는 질퍽하여 다니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또다시 회의를 하여 마을회관에서 가까운 곳으로 자리를 옮기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마을회관 길 건너에 있는 집 뒤쪽으로 작은 수로가 흐르는데, 그 수로 위에 콘크리트로 판석을 만들어 10여 년 전부터는 그 위에서 제사를 모셔오고 있다. 그러나 마을사람들이 쓰레기를 버리고 생활폐수가 수로를 따라 흐르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옮기자는 의견도 있다. 또 옆의 논 주인에게 제단을 만들기 위해 10평 아니면 3평 정도의 땅이라도 희사를 하라고 권하고 있다고 한다.

충제는 단절된 지 오래되었다. 본래 마을 뒷산에 모셔왔는데 당시에는 마을 소유의 산이었다. 그러던 중 마을 형편이 어려워져 개인에게 팔게 되었다. 그 뒤 마을사람들은 협의를 하여 충제를 모시던 터에 표지석을 세우기로 했다. 당시 마을 분이 허종석 씨가 써준 대로 표지석을 만들어 그곳에 세웠다. 표지석에는 ‘사직단’이라고 새겨져 있다고 한다. 허종석 씨가 충제를 모시던 터에 임의적으로 사직단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다른 마을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이 마을에서도 반촌만 충제를 모신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반촌의 경우는 노거수가 있어서 금방 알 수 있으며, 이런 노거수가 있는 마을에서만 충제를 모시는 것이라 한다.

[제관의 선정 및 역할]

거리제를 모시기 위해서 우선 제관을 선정한다. 마을에서 한학을 하는 분이 생기복덕을 보아 사람을 가린다. 요즘은 선정을 하더라도 당사자가 제관 맡는 일을 꺼려하기 때문에 무척 힘이 든다고 한다.

본래 헌관 한 명, 축관 한 명, 그리고 제물을 만들 사람 한 명 등 총 세 명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들이 꺼리는 관계로 헌관과 축관만 뽑고 일체의 제물과 마을사람들이 음복을 할 수 있는 음식은 이장 댁에서 도맡아 한다.

제관은 한 보름 전에 선정한다. 생기복덕을 보지만, 또한 집안이나 개인에게 궂은 일이 있는지도 가린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해서 제관들은 나이가 연만한 분들 중에서 고른다.

제물은 마을 돈으로 장만한다. 이장이 장을 보아오며, 가능하면 제상에 올릴 제수 외에도 마을사람들이 모여서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음식을 마련하기 위해 넉넉히 산다. 주과포를 위주로 하고, 나물과 돼지머리도 준비한다.

제사에 사용할 축문도 낮에 쓴다. 본래 마을에 충제축문도 있지만,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특히 마을의 동계책과 상두계에 관련된 두꺼운 책이 있었는데, 지금은 망실되어 남아 있지 않다. 매년 축문은 새로 쓰는데, 사실은 이 마을의 이영년 씨가 이웃에 있는 세등마을의 축문을 참고하여 새로 작성하고 있다.

충제를 모실 때는 아침 일찍 제관들 3인이 산에 올라갔다. 제를 모실 곳을 청소하고 차일을 치고 거기에서 다음날 아침까지 머물면서 밤에 충제를 모셨다. 제관 3인은 거기에 머물면서 밥을 해먹고 또 제물을 마련해야 했다.

충제에 올라가는 제관들도 생기복덕을 보아서 뽑았다. 충제를 모시러 올라간 제관들은 소변을 보았을 경우 손발을 씻고 세수를 해야 하며, 대변을 보면 목욕을 하고 옷을 새로 갈아입어야 했다고 한다.

[절차]

거리제는 정월 14일 준비해서 12시경에 모신다. 헌관, 축관, 그리고 이장이 참여하며 깨끗한 사람이 함께 가기도 한다. 제사를 모시기에 앞서 마을회관에서 굿을 치기 시작한다. 요즈음은 굿을 칠 사람들이 거의 없어 치지 않지만, 예전에는 초저녁부터 꼭 굿을 쳤으며, 특히 샘굿을 치고 마을을 돌아다녔다.

11시가 임박하면 제관들은 제상을 차린다. 제사를 모시는 순서는 방안에서 모시는 제사와 동일하며 초헌을 하고 나서 독축을 한다. 축문은 제사가 끝나면 소지를 한다.

제사가 끝나면 상에 올렸던 제물은 한곳에 모아서 제터에서 10여m 떨어진 마을회관 앞 길가에 짚을 깔고 부어버린다. 제사가 끝나고 이렇게 내전까지 주고 나면 제관들은 마을회관으로 돌아간다.

예전에 충제를 모실 때는 제관들이 산에 오른 후에 각 가정에서는 들일도 하지 않고 빨래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쉬었다. 그리고 각 가정에서는 메, 탕, 생선, 떡 등을 장만하여 논밭에 가지고 나가 땅에 묻었다. 어떤 집에서는 논이나 밭둑에 넓적한 돌을 놓아두었다가 그 돌 밑을 긁어 판 뒤 음식을 묻었다.

이를 ‘지숙 받아먹는 돌’이라 해서 평소에도 조심했다고 한다. 그리고 반드시 여자가 이러한 일은 해야 한다. 들에 나가기 전에 목욕을 하고 깨끗한 새 옷으로 갈아입는다. 음식을 묻으면서 “고랑님네 농사 잘 되해 해주십소사.” 하고 입으로 빌기도 한다.

이 마을은 특수한 사정으로 거리제를 모시기 시작했다. 오래 전에 단절된 거리제를 다시 복원하게 된 것은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항상 두려워하던 차에 마치 전설처럼 어떤 노인이 지나면서 거리제를 모시지 않으면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계속될 것이라는 말을 남겼던 것이다. 이는 현대에 만들어진 일종의 당신화이다.

이 마을에 전해지는 이야기 하나는 쇳소리와 관련된 것이다. 이 마을 뒷산의 이름은 ‘건배산’인데, 정월 초사흘 전에 건배산에 쇳소리가 울려서는 안 된다는 말이 전하고 있다. 그런데 1961년에 어떤 사람들이 섣달 그믐에 모여 놀다가 흥이 과해서 초하룻날 쇠를 치고 놀았다.

마을 몇몇 사람들은 쇳소리를 듣자 걱정을 했다. 그런데 오후가 되자 모여 놀던 사람들 중에서 싸움이 일어나 결국 한 사람이 죽는 일이 벌어졌다. 그래서 지금도 절대 초사흘 전에는 굿을 치지 않는다고 한다.

[제물/용품/제구]

충제를 모실 때는 돼지머리 대신 닭을 썼다. 제상에는 준비한 주과포, 나물, 돼지머리, 술잔을 올리고, 메와 탕은 각 3그릇씩 올린다.

[부대행사]

연말에 마을 총회를 열어 여러 가지 마을일을 논의하고, 거리제의 결산도 한다. 총회와는 별도로 거리제를 모시고 나면 밤에 마을사람들이 회관에 모여 놀면서 준비한 음식과 술을 나누면서 때로는 날을 샌다고 한다.

초저녁부터 주로 남자들이 회관에 모여 놀다가 거리제가 끝나고 내온 음식을 나누면서 이야기도 하고 화투도 즐기곤 한다. 또 예전에 굿을 치는 사람들이 거리제에 참여했을 때는 제사가 끝나면 마을회관에서 또 한판의 굿이 벌어지기도 했다.

6·25전쟁이 지난 후에도 대보름날은 줄다리기를 하고 놀았다. 마을의 모든 남녀노소가 다 나와서 윗마을과 아랫마을로 편을 갈라 줄다리기를 하고 놀았다. 이때는 농한기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를 하였으며 또 걸궁을 차려 굿을 치고 놀았다.

[금기]

제관을 뽑을 때 대개 상복을 입고 있는 사람이나 아이를 낳은 집의 사람은 제외되며, 별다른 탈 없는 사람을 고르게 된다. 정월 들어서 개고기나 산고기(특히 노루)를 먹은 사람은 절대로 제관이 될 수 없다. 또한 집사람이 제사를 모시는 기간 동안 달거리가 있어서도 안 된다.

[현황]

충제가 없어진 까닭을 이 마을에서는 교회와 천주교의 영향으로 보고 있다. 1960년대에 대사라는 마을에 교회가 서고, 초사리에는 천주교가 세워졌다. 마을에 교인들이 많았다. 마을사람 절반 이상이 신도였다. 신도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미신이기 때문에 충제를 모시지 말자는 의견이 돌았다. 군내면 분토리의 경우에도 역시 동일한 말을 들었다.

그 후 충제는 더 이상 모시지 않지만, 오래 뒤에 충제를 모셨던 터에 표지석을 세운 것을 보면 나름대로 전통에 대한 애착을 남아 있음을 본다. 그리고 오늘날 마을에서 아무도 거리제를 폐지하자는 의견은 내놓지 않고 있다. 거리제 자체가 특수한 사정으로 인해서 재현된 것이기 때문에 아직은 전승의지가 강한 것으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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