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03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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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峙-嶺 |
영어의미역 | pass |
분야 | 지리/자연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집필자 | 조기만 |
[정의]
산등성이와 봉우리 사이의 낮은 부분을 총칭하는 말.
[개설]
고개에는 전설과 그 지역의 지명과 관련된 명칭이 붙어 있다. 고개와 관련된 지명은 ‘고개’, ‘재’, ‘티’, ‘치’, ‘개’ 등이 있다.
[현황]
『진주시사』와 『진양군사』를 중심으로 진주시의 고개를 살펴보면 대략 42곳으로 파악된다. 이들 고개를 위치와 명칭 유래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가막고개는 진주시 대평면 대평리 대평마을 북편에 공동 묘지가 있는데, 그 아래쪽에 위치한 고개이다. 진주에서 산청군 덕산으로 통하는 오솔길로서, 그 고개를 갈 때에는 짐을 많이 지지 말라고 가막고개라 부른다. 가실재(공치재)는 진주시 일반성면 창촌리에서 가선리 가곡으로 넘어가는 곳에 있으며, 해발 100m 정도의 고개로서 옛날 함안 지방으로 내왕하면서 쉬어가던 곳이다. 개고개는 진주시 장재동에서 하촌동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고개로서, 장재동과 하촌동의 경계가 된다. 까앙재(까망재)는 하촌부락 앞산에 있는 고갯길로서, 옛날 이 산을 중심으로 까치와 까마귀가 많이 날아와 앉았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니우재는 진주시 대곡면 용암리 의우령(議友嶺) 용댕이에서 미천면 어옥리로 가는 고개로, 옛날 용댕이(龍岩)와 늘억실[於玉里] 사이에 분쟁이 생겼을 때마다 니우재에서 담판을 지었다고 한다.
달래고개는 진주시 문산읍 삼곡리에 위치하며 남산 중턱에 있다. 어느 날 의좋은 남매가 남산 먼당에 있는 밭에 일하러 여동생을 앞세우고 가는데, 갑자기 내린 소낙비를 맞아 비에 젖은 베옷이 과년한 여동생 몸에 찰싹 달라붙자 그 몸매에 욕정을 느낀 오빠가 자기의 불륜한 마음가짐을 뉘우치고 고개마루에 올라가서 생식기를 돌로 찍어 죽고 말았다. 앞서 가던 여동생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빠가 오지 않자 고개를 되돌아가보니 그런 참변이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그러한 광경을 본 여동생은 울부짖으며 “무엇 때문에 죽었을까? 한번이라도 달래나 볼 것이지” 했다는 유래가 있어 달래고개라고 한다.
당산(堂山)은 진주시 대곡면 용암리 서낭당 고개의 큰 소나무 밑에 있는 돌무덤이다. 옛날 남편이 공부만 하고 살림을 돌보지 않자 집을 나갔던 부인이, 남편이 과거에 급제하여 영화를 누리게 되자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다가 목매어 죽은 자리라고 한다.
다음으로 진주시에는 당산재라고 하는 고개가 2곳이 있는데, 한 곳은 오동골에서 이현북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당산재[당산티[堂山峙]]라 한다. 또 한 곳은 진주시 사봉면 마성리 마을 뒷산 북쪽에 있는 고개이다. 박달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고목으로서 나무의 수령은 알 길이 없으며 마을의 안녕을 비는 뜻에서 매년 음력 정월 보름날에 동신제를 지내고 있다. 대밭고개 진주시 일반성면 창촌리에서 새터[新基]로 가는 고개이다. 옛날에는 대밭이 있었다고 한다.
진주시에는 앞서 당산재와 같이, 돌고개라는 동일 명칭의 고개가 2곳이 있다. 한 곳은 진주시 내동면 독산리에 있는 고개로, 진주 시내와 옛 진양군의 경계에 돌미륵이 있었다. 그 돌미륵 때문에 독산마을에는 힘센 장사가 많이 태어난다고 전해지자 강 건너 평거 사람들이 밤에 몰래 돌미륵을 부수니 붉은 피가 흘러내렸고 그 뒤로는 장사가 태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또 한 곳은 진주시 명석면 오미리 시목마을과 진주시 대평면 대평리 대평마을의 경계에 있는 고개이다. 옛날에는 오솔고개라 불리었으며, 돌이 많아 돌을 모으는 당산이 있었다.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지리산 빨치산 부대의 통로였는데, 이곳에서 자수를 하자는 공비와 자수를 거부하자는 공비들 간의 의견 충돌로 자수하자는 공비들을 사살한 고개이기도 하다. 지금도 돌고개에는 공비의 무덤이 있다.
돌구재는 진주시 대곡면 용암리 용암사 서쪽 미천면 상미리로 가는 고개이다. 두우개(두고개, 두우고개)는 이현북동의 중심을 이루는 마을로서, 2개의 골짜기에 마을이 퍼져 있으며 고갯길이 두 개가 있어 생겨진 이름이다. 둔티재는 진주시 내동면 독산리 남서쪽에 있는 재먼당으로, 옛날 나라에 세미(稅米)를 바치기 위하여 인력으로 세미를 짊어지고 사천시 축동면 조창항으로 가면서 쉬어갔던 곳이라고 한다. 떡고개는 진주시 문산읍과 호탄동의 경계를 이루는 곳으로, 옛날 떡장수가 얼어 죽었다는 얘기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말방재는 진주시 미천면 어옥리와 진주시 대곡면 월암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이다. 교통이 발달하지 못한 옛날에는 진주 지방에서 의령 방면으로 왕래하던 유일한 길이었다. 당시 길 가던 이들이 말방재에서 말을 매어두고 한참씩 쉬어 가던 곳이라고 한다.
말티고개는 진주시의 남동쪽에 위치한 선학산 마루를 지나는 고갯길로 의령 방면으로 빠지는 길목이다. 망고개는 진주시 금산면 금산리 관방마을과 사동마을을 오가는 고개이다. 이조판서 이준민이 일시 귀향하던 중 수성촌에 사는 수찬 강응태와 상론코자 가방으로 간다는 말을 전하고 기다리던 고개인데, 이를 후인이 망고개라 하였다. 면애기고개는 진주시 명석면 오미리에 있는 고개의 맞은편 산 이름이다. 산의 형국이 면앵(眠鶯) 같다고 하여 면애기고개라고 부른다. 못재(부지현)는 진주시 상봉동에서 가마못 북쪽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못이 가까이에 있어 지어진 이름이다.
무넘이재는 산청군 생비량면 한덤이[大屯里]에서 솔기로 넘어오는 높은 고개이다. 옛날 이곳 사람들이 무넘이재를 넘나들며 진주를 왕래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천지개벽 시에 물이 넘나들었다고 한다. 삐떡재는 진주시 지수면 용봉리 우기미 서북쪽에서 안계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지형이 비둘기처럼 생겼다 하여 구현고개 또는 안계고개라고도 부른다. 서낭당은 진주시 대곡면 용암리 절골 북쪽 미천면 상머리로 가는 고개로, 옛날 이 고개를 넘어설 때 오고가는 사람마다 돌을 던져 잡신을 없앴다고 한다.
서부실재는 진주시 이반성면 장안리 검정 남쪽에서 평촌 서부실로 넘어가는 재이다. 어느 날 낯선 사람이 선조의 묘를 파헤치자, 소금을 지고 가다 이것을 본 후손이 말리려고 급히 뛰어가다 소금섬을 진 채로 둠벙에 빠졌다고 한다. 선학재는 진주시 하대동 서쪽에서 옥봉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솔티는 진주시 내동면 내평리에 있는 고개로서 산에 소나무가 많이 있다 하여 솔티라고 부른다. 마을 앞에는 진주~하동 간 일반국도가 지나고, 뒤로는 경전선 철도가 있다. 쌔이고개는 옥봉남동과 옥봉북동의 경계를 잇는 고개로 시내와 옥봉북동간 지름길로 이용되고 있다.
애티고개는 진주시 문산읍 상문리에 위치하며 문산읍과 진성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고개이다. 일명 ‘귀내고개’라고도 하며 일반국도가 개설되기 이전에는 길이 험하고 고개가 깊었으므로 도적 떼나 맹수 때문에 혼자서는 넘지를 못했다고 한다. 또한 진주 지역에는 양산고개가 있는데 지나는 행인들이 고개를 지날 때마다 돌맹이와 나뭇가지 등을 던져 모아진 조산이 근년까지 있었다고 한다. 용당고개는 진주시 대곡면 용암리 용암에서 북쪽 미천면 상미리로 가는 고개이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붓으로 쳐서 산이 갈라졌다고 한다.
장고개는 진주시 초전동 서짓골 서쪽에 있는 고개이다. 장재못은 진주시 금산면 갈전리 월평의 서쪽에 있으며, 국유하천으로 되어 있다. 옛날 장씨라는 큰 부자가 살던 집터였는데 시주 얻으러 온 스님을 박대한 후로 차차 망하여 그 자리가 패여 못이 되었다고 한다. 또 옛날 부흥더미에 북강(北江)이 있었는데 큰 대수(大水) 때 절강(切江)이 되어 물이 다른 곳으로 빠지고 깊은 곳이 각각 장재못과 서원못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제리재고개는 진주시 정촌면 관봉리에 있는 고개로서 광복 당시에는 제리재고개를 통행하는 상인들이 하루에 20~30명씩 묵고 갔다고 한다. 조고개는 진주시 내동면 신율리 서북쪽에 있는 고개이다. 독산마을에서 대동마을로 오면 첫 동네인데 조고개라 부르기도 한다. 중티는 진주시 문산읍 상문리 동편에 있는 막다른 골짜기 고개이다. 이 고개를 넘으면 갈촌리이고, 서쪽 아래에는 중티못이 있다.
장등재[長嶝峙]는 집현산에서 신기 길까지 뻗은 등(嶝)이다. 질매재는 월아산의 두 봉우리 사이를 말한다. 금산면~진성면간을 넘나드는 고개로, 형국이 소 짐 싣는 질매와 비슷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차현(車峴)은 진주시 금곡면 검암리에 있는데 수레가 고개를 넘었다는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차현은 수레재와 서삼미로 이루어져 있는데, 동쪽 마을은 수레재요, 서쪽 마을은 서삼미(西三美)이다. 서쪽에 삼미정(三美井)이라는 좋은 우물이 있다 하여 서삼미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차현에는 진양강씨가 살았는데 임진왜란 때 피난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여 약 이백 년간 마을이 비었고, 그 후 진양정씨·초계정씨·문화유씨 세 성이 이주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천고재[千古峴]는 진주시 명석면 신기리에서 산청군 신안면 청현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일명 청현(靑峴)재라고도 한다. 예전에는 후미지고 산적들이 많아 천명이 모여야 왕래하였다고 한다. 춘향이고개는 진주시 내동면 신율리 북쪽에 있는 나지막한 고개이다. 옛날 소리길로 다닐 때 출향 인사와 상인들이 많이 왕래하다 보니 출향을 사투리로 말해 춘향이고개로 부르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골재(이리고개)는 진주시 이반성면 대천리 깊은 한골 남쪽에 있는 고개이다. 옛날 고개가 깊고 험하여 행인들이 고개 밑 주막에서 이레 동안 모여서 여러 사람이 같이 고개를 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