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04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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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德齡-晋州- |
영어의미역 | Why Kim Deokryeong Kept Jinju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동민 |
[정의]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에 전해오는 김덕령 장군이 진주성싸움에 참가하게 된 사연에 관한 설화.
[채록/수집상황]
임진왜란 당시 김덕령의 활약상은 『선조실록』, 『연려실기술』 등에 전해 오고 있으며, 근래에는 신동흔의 『조선의 영웅 김덕령』과 안동준의 『진주 옛이야기』 등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전라도 광주 일대에서 효자로 소문난 김덕령(金德齡)이 스물두 살 때였다. 어머니가 중병에 걸려 살아날 가망이 없었는데, 당시 경상도 진양땅 자매실(지금의 수곡면 자매리 자매마을)에 명의(名醫)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서 김덕령은 밤새 삼백 리 길을 말을 타고 달려왔다.
그러나 명의는 “광주로 가려면 닷새나 걸리는데 당신 어머니는 워낙 위중해 내일이면 죽을 것이오.” 하면서 도와주기 어렵다고 하였다. 김덕령은 그 말에도 명의를 계속 설득했고, 김덕령의 효심에 감동한 명의는 결국 같이 가겠다고 했다. 김덕령은 명의를 안고 말을 타고는 호랑이처럼 달려 다음날 정오에 집에 닿았다. 명의의 처방을 받은 김덕령의 어머니는 중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그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덕령은 명의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며 진주로 달려왔다. 그리고 자매실 앞산에 진을 치고 왜구를 무찔러 은혜를 갚았다. 자매마을 서쪽 문서골에는 그 명의의 의서(醫書)와 침을 감추어 둔 것으로 전해지는 당새기 바위가 있다. 그 명의의 이름은 김남(金楠), 혹은 유이태(劉以(爾)泰)라고 한다.
자매마을의 복지산에는 임진왜란 당시 김덕령 장군이 쌓은 성터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금산면 월아산 장군대에도 목책을 쌓아 진을 친 곳이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흔적도 없고, 1978년 월아마을 입구에 세운 유허비만 남아 있다.
[모티브 분석]
기본 모티브는 김덕령 장군이 진주성 싸움에 참가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다. 김덕령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 되어, 곽재우와 같이 권율의 휘하에서 경상남도 서부지역의 방어 임무를 맡았다.
또한 이 설화는 명의 유이태 이야기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유이태는 중국의 명의(名醫) 편작에 비유되는 인물이다.
[의의와 평가]
전라남도의 광주사람인 김덕령이 경상남도 진주까지 와서 왜구를 무찌르게 된 내력을 밝혀주는 전쟁담이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싸움에는 진주 사람들만 아니라 다른 지역 사람들까지 합세하여 왜군을 물리쳤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