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06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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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미역 | Bamboo Fruit |
이칭/별칭 | 죽실(竹實)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집필자 | 박기용 |
성격 | 기원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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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등장인물 | 봉황새 |
관련지명 | 죽동|죽전 |
모티프 유형 | 봉황새를 보호하는 형국의 비봉산 |
[정의]
경상남도 진주시에 전승되는 비봉산(飛鳳山)과 대나무 열매에 얽힌 설화.
[개설]
신라 말과 고려 초 쯤 풍수사상이 우리나라에서 유행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영향으로 각 지역마다 풍수의 관점에서 복을 취하려는 설화가 많이 생겼다. 대나무열매 설화도 그런 유형 중 하나이다.
[채록/수집상황]
진주시에서 1983년에 발행한 『내 고장의 전설』에 처음 수록되었고, 그 후 진주문화원에서 1994년에 발행한 『진주문화』16집에 재수록되었다.
[내용]
산이 봉황새처럼 생겼거나 봉황새가 산다고 생각하여 봉산(鳳山)이라고 불리는 산이 있었는데, 전설에 따르면 봉황새는 오동나무에 깃들고, 성질이 고결하여 굶주려도 좁쌀은 먹지 않고 대나무 열매[竹實]를 먹고 산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산에는 오동나무를 심고 강가에는 대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진양지』의 관기총설(官基總說)에 비봉산을 봉황새로 설정하고 비봉산 둘레에 대롱사(大籠寺), 중롱사, 소롱사를 창건하여 새가 날아가지 못하도록 봉황새를 보호하는 형국을 취하였다고 전한다.
관아 건물 또한 진주의 진산인 비봉 아래에 있는 금롱(金籠)의 형국에 위치하도록 하였다. 게다가 객사의 누각을 봉명루(鳳鳴樓)라 하였고, 비봉산 아래에 죽동(竹洞), 죽전(竹田)마을이 있어 봉황새가 먹는 대나무 열매를 공급토록 한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였다.
작평(鵲坪)이라는 들판 이름도 봉황새가 까치를 보면 날지 않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고, 진주성의 앞산을 망진산(網鎭山)이라고 한 것은 봉황새가 그물을 보면 날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진주 지역 사람들은 봉황새가 사는 곳에는 인재가 나고 후손이 번영한다는 믿음으로 대나무를 심고 가꾸었다. 그 결과 남강변을 따라 많은 대나무가 자라게 되었고, 그것이 조선시대에는 진주 지역의 장관(壯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때는 실제로 대나무 열매가 유용한 양식으로 쓰인 적도 있었다.
1894년에 일어난 동학혁명으로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마을들이 곤욕을 치를 때 보리농사마저 흉년이 들어서 마을에서는 밥 짓는 연기를 볼 수가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견디다 못해 산에 가서 칡뿌리를 캐거나 송기(松肌: 쌀가루와 함께 섞어서 떡이나 죽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는 소나무의 속껍질)를 벗겨 먹는 등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하였다.
사람들이 이처럼 고통을 당하는데, 뜻밖에도 7월과 8월에 산죽(山竹) 수만 대가 돋아나는 이변이 일어났다. 죽실(竹實)은 보리쌀 비슷하게 생겼으나 보리쌀보다는 약간 작고, 밥을 지을 수도 있으며 가루로 빻으면 수제비도 끓일 수 있었다. 죽이나 술 등의 대용식으로 가능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비상식량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모티브 분석]
대나무열매 설화는 모티브가 여러 가지이다. 하나는 진주의 진산을 봉산으로 보고 여러 가지 건축이나 마을을 조성하였다는 내용이며, 또 하나는 산 이름이나 들판 이름 등의 지명 역시 봉황이 날아가지 못하도록 한다는 믿음에서 붙였다는 내용이다. 그 결과 실제로 어려웠던 시절에 대나무 열매로 사람들이 연명을 하기도 했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의의와 평가]
진주 지역의 산세와 산세에 얽힌 풍수적 믿음이 지명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주고 있음을 살필 수 있게 하는 설화라는 점에서 조상들의 지형과 지명 유래에 관한 사상을 찾아볼 수 있는 귀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