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09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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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文益漸-鄭天益 |
영어의미역 | Mun Ikjeom and Jeong Cheonik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집필자 | 김동민 |
[정의]
경상남도 진주시에 전해오는 문익점(文益漸)과 정천익에 관한 전설.
[채록/수집상황]
문익점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목면의 종자를 가지고 왔다는 첫 번째 기록은 권근(權近)의 상소문에 보인다.
1980년 8월 12일 정상박, 성재옥이 경상남도 진주시 주안동 촉석경로당에서 채록하였으며, 1981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발행한 『한국구비문학대계 』8-3에 수록되었다. 제보자는 이일해(남, 76세)이다.
[내용]
문익점은 고려 공민왕 때의 관리이고, 정천익(鄭天益)은 문익점의 장인이다. 문익점은 전국에 면업을 일으킨 공로를 인정받아 조선시대에 강성군(江城君)으로 봉해졌다. 그런데 목화 시배에 관해 문익점과 정천익 집안 사이에 시비(是非)가 있었다.
붓에 목화씨를 숨겨온 문익점이 소남(召南) 관정이란 곳에 살고 있는 장인 정천익에게 이렇게 부탁했다고 한다.
“내가 목화 종자를 가져오기는 했는데 목면(木綿)이 아니고 초면(草綿)입니다. 이 초면은 한 해 살고 한 해 죽는 것이니, 이것을 재배해 보십시오.”
그래서 정천익이 목화를 재배했는데, 첫해에는 겨우 몇 개만 살아 꽃이 피었다. 그 씨를 까보니 여남은 낱이 되었다. 그런데 물에 담그니, 잔뿌리가 나오지 않아 스스로 영양소를 섭취 못하고 시들어 죽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정천익은 삼 년 만에 재배에 성공했다.
한편, 강성군으로 봉해진 문익점이 목화씨를 배양(培養)해서 재배를 했다는 말도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문익점과 정천익이 두 집안 자손들 사이에서는, 씨는 문익점이 가져왔지만 재배는 정천익 집안에서 했다, 문익점이 재배까지 다 했다는 시비가 벌어졌다고 한다.
[모티브 분석]
이 설화의 기본 모티브는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붓대 속에 목화씨를 가져와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배양마을에서 처음으로 시배했다는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목화라고 하면 문익점이란 이름부터 떠올리는 경향이 많은데, 이 설화에서는 문익점과 정천익 두 집안 자손들 사이의 시비(是非)를 바탕으로 직접 재배한 사람이 분명치 못하다는 논란거리를 남겨놓고 있다.
[의의와 평가]
문익점이 중국에서 들여온 목화씨의 시험 재배에 성공하여 목면을 보급한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 진주 설화는 문익점의 장인 정천익이란 인물을 부각시켰다는 점이 이채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