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12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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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上疏狂姜應龍 |
영어의미역 | Kang Eungnyong the Appealer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집필자 | 박기용 |
[정의]
경상남도 진주시에 전해오는 강응룡(姜應龍)의 상소에 얽힌 설화.
[채록/수집상황]
이 설화는 1983년 진주시에서 편찬한 『내 고장 전설』에 처음 수록되었다. 그 후 1994년 진주문화원에서 편찬한 『진주문화』16집에 다시 수록되었다.
[내용]
조선시대 진주에 강응룡이라는 상소(上疏)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비록 글 솜씨는 뛰어나지 않으나 성품이 괴팍스러워 상소를 평생의 업으로 삼았다. 강응룡은 소장(疏狀)을 올려도 반드시 방백(方伯)을 통해 올렸다. 사안이 중요하건 사소하건 간에 번번이 상소를 하였기 때문에 방백은 강응룡의 상소 때문에 골치를 앓았고, 아전들도 강응룡의 상소라고 하면 받기를 꺼렸다.
어떤 때는 관아에서 상소받기를 꺼리면 방백이 나들이하는 가마채를 붙잡고 흔들거나 말고삐를 붙들고 실랑이를 벌이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가는 길을 막고는 “진주 고을 강응룡의 상소문이요!” 하고 외치며 물고 늘어지면 내로라는 방백일지라도 배겨내지 못하고 받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사사건건 사소한 일을 가지고 상소를 하기 때문에 방백에게 번번이 묵살되고 대수롭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딱 한 번은 제대로 받아들여진 적이 있었다.
그것은 성균관 유생들에게 일대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 되었다. 향시(鄕試)를 보고 성균관에서 공부하는 유생들은 대개 삼백 명 가량으로 대식솔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초시(初試)에 오른 선비들이어서 나라에서 후하게 대접을 하였고, 식탁은 호화로운 반찬이 제공되었는데 쇠고기 반찬에 침식까지 제공되었다.
이때 식품을 제공하는 업자는 낮은 값으로 소를 사서 높은 값으로 납품을 하였기 때문에 폭리를 취하고 있었다. 강응룡은 유생들의 반찬거리로 귀중한 진주 소가 죽어나가는 것이 불쾌하였고, 국록(國祿)으로 그들에게 육식을 제공한다는 것이 못마땅하여 “성문대하(聖門臺下)에 도살이 웬 말이며, 유생의 호식(豪食)은 당치 않습니다.” 하고 분개한 어조로 상소문을 올렸다.
임금은 강응룡의 상소가 지당하다고 판단하여 그때부터 성균관에 금육령을 내렸다. 그 후로 성균관의 쇠고기 식사는 없어졌으며, 성균관에 금육 관습이 지속되었다고 한다.
[모티브 분석]
이 설화는 ‘그릇된 방법으로 좋은 결과 얻기’ 유형에 속하는 민담이다. 이 설화의 모티브는 쓸모없어 보이는 사람의 상소도 한 번은 쓸 말이 있다는 내용이다.
[의의와 평가]
세상에서 못났거나 모자라는 듯이 보이는 사람에게도 쓸 말과 배울 점이 있다는 가르침을 강응룡의 전설을 통해서 살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