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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1609
한자 龍巖寺址
영어음역 Yongamsaji
영어의미역 Yongamsaji Archaeological Site
분야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리 219[용암길46번길 34-43]지도보기
시대 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장기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절터|사지
원건물 건립시기/일시 고려 전기
소재지 주소 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리 219[용암길46번길 34-43]
소유자 국유

[정의]

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리 219[용암길46번길 34-43]에 위치한 절터.

[개설]

용암사지에 관한 정확한 문헌기록은 없다. 폐허지 위에 흩어져 있던 부조 및 석불좌상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며, 옛 사지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사찰이 건립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명칭유래]

신라 말 연기(烟起) 도선(道詵)[827~898]이 성모천왕(聖母天王)으로부터 비밀리에 부촉을 받고 선암(仙巖), 운암(雲巖), 용암(龍巖)의 세 사찰을 창건했다고 하는데, 용암사는 이 사찰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용암사지는 용암사가 있었던 터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원건물 건립경위]

용암사는 고려시대 1314년(충숙왕 1) 무외(無畏) 국통 정오(丁午)가 온 이후로 크게 중창되기 시작했다. 1315년 충숙왕은 제찰사 한중희 등에게 전지를 내려 사찰을 경영하게 하였고, 1316년 가을에는 제찰사 박효수에게 사찰을 중창하게 함에 따라 1318년 80여 칸을 새로 짓고 20여 칸을 중수했다. 당시 전당 안에는 닥나무 종이를 바르고 왕골을 깔았다고 하며, 금당에는 석가여래상을 봉안했다고 한다.

또한 정오가 저축한 돈과 모금한 것으로 관음보살과 정취보살상을 도금했으며, 대장경도 봉안했다. 당시 염장별감 이백겸과 방우정은 왕명에 따라 설전지 3만여 장과 옻칠한 함상자 140여 개를 만들었으며, 정오의 제자 승숙, 일생 등은 강화도 판당에 가서 부족한 장경을 찍어와 신본과 구본을 합해 모두 600여 함을 만들어 비단으로 치장한 뒤 새 전당에 봉안했다. 이 해 11월 18일 방우정이 다시 왕명을 받아 7일 동안 낙성법회를 성대하게 베풀었다. 용암사가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전하지 않는다.

[위치]

현재 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리 219번지[용암길46번길 34-43]에 위치해 있다. 이반성면 우체국에서 용암리로 들어서다 제실 앞쪽에 형성된 곡부를 따라 오르면 용암사지가 보인다.

[현황]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현재 용암사지에는 해주 정씨들이 세운 화덕재가 있으며, 건물 뒤편으로 용암사지 부도(보물 제372호)를 비롯하여 용암사지석불(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호), 석등, 석비 등이 산재해 있다. 이들 석조물 주변으로 와편과 자기편이 지표에서 확인되었다. 용암사지 내에는 건물의 부재로 추정되는 치석된 석재들이 기단, 담장 등에 사용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용암사지에는 고려시대 부도를 비롯하여 석불, 석등, 석비 등이 산재해 있어 불교미술사적으로 진주지역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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