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7003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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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豪族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
시대 | 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이세호 |
[정의]
신라 말, 고려 초에 현재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에 해당하는 지역의 사회 변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지방 세력.
[개설]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 제도의 정비와 기구의 확대로 왕권의 통치권을 강화하던 왕실도 신라 중대 말에 이르러서는 진골 귀족 세력의 강한 반발에 부딪히게 된다. 경덕왕 대에 전국 주·군·현의 지명을 중국식으로 고치고, 당나라 제도를 기준으로 하여 각 관서의 관서명과 관직명을 더욱 합리적으로 고치면서 일원적으로 정비된 행정 체제를 수립하여 중앙의 통치권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왕권 강화책은 귀족들의 강한 반발로 말미암아 성과를 거두지 못하게 된다. 혜공왕 대에 와서 96 각간(角干) 간에 다툼이 일어난 것은 신라 왕실이 족장을 통솔할 만한 지배 체제의 유지도 곤란해졌음을 뜻하며, 또한 혜공왕 12년(776)에 경덕왕 대에 고친 관제를 그 이전으로 복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왕권 강화를 위한 관제 개혁이 실패로 끝났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신라 중대 왕실의 약화로 말미암아 무열왕 직계의 중대 왕실이 무너지고 방계인 나물왕계의 왕실이 등장하면서 신라는 치열한 왕위 다툼과 귀족들의 상쟁이 계속되는 신라 하대의 혼란기로 접어들게 된다.
신라 하대의 왕위 쟁탈전과 중앙 귀족 간의 세력 다툼으로 신분 제도에도 상당한 변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진골 귀족 자체의 증가는 자체 내의 도태 작용을 일으켜 많은 귀족이 반역죄로 처형되거나 육두품으로 강등되고 있었다. 그리고 중앙의 정치 싸움에서 실패한 세력은 지방으로 낙향하여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지방의 장원이나 목장과 친족 집단을 기반으로 하여 지방 호족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한편 하대에 와서 지방에서 대두하기 시작한 호족 세력들에는 중앙의 정쟁에서 밀려난 귀족이 낙향하여 지방 세력화한 것도 있으나 대개는 대대로 그 지방에 토착하였던 촌주(村主)[신라의 말단 행정 구역을 다스리는 우두머리] 계통의 지방 세력에서 비롯되기도 하였다. 이들 촌주 계통의 지방 세력들은 신라의 지방 지배 체제에서 지방의 군현과 일반 백성과의 중간에서 다리 역할을 하는 위치에 있어, 신라 지방 사회의 실제적 지배자로서 직접 생산 활동에 종사하고 일정한 세력 범위 내에서 촌민을 지배하는 계층이었다.
[인천의 호족]
1. 인주 이씨
인천 지역의 대표적인 호족으로서는 인주 이씨[인천 이씨]가문을 들 수 있다. 인주 이씨의 선조는 신라의 대관으로서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황제에게 잘 보여 이씨라는 성을 하사받았다. 이후 그의 자손이 소성현(邵城縣), 즉 인주(仁州)[인천광역시 지역의 옛 지명]로 이주하였다. 이허겸(李許謙)의 대에 와서는 소성백(邵城伯)의 봉작을 받았으며, 그의 아들이 상서우복야 이한(李翰)이며, 이한의 아들이 이자연(李子淵), 이자상(李子祥)이다.
고려 전기에 인주 이씨가 성장하게 된 것은 이자연에게서 시작한다. 인주 이씨 가문의 성장 배경으로는 ① 신라 말 고려 초에 이미 인천 지역 중심 해상 호족 세력으로서의 기반을 확보하였다는 점, ② 이허겸의 아들들이 무장(武將)의 실력을 갖추고 안산 김씨 등과 통혼하고 있었다는 점, ③ 이허겸의 외손인 김은부(金殷傅)의 딸이 현종(顯宗)의 비가 된 점, ④ 이자연의 외가가 경주 김씨이고, 그 처가가 안산 김씨인 김인위(金因渭)의 가문이라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여기에 이자연은 자신의 세 딸을 문종(文宗)의 비로 들임으로써 왕실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후 인주 이씨는 문종에서 인종(仁宗)까지 약 5대 100년간 왕비를 배출하였다.
고려 중기 인주 이씨가 외척으로 세력을 떨치는 과정에서 왕위 계승에 관여하려는 음모가 나타나게 되었고, 심하게는 왕권 자체를 탈취하려는 변란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자의(李資義)의 변란 음모와 이자겸(李資謙)의 난이 그것이다.
선종(宣宗)이 죽고 헌종(獻宗)이 열두 살의 나이로 즉위하였는데, 헌종이 어리고 병약하여 그 모후(母后)인 사숙 태후(思肅太后)가 국정을 좌지우지하자 국정이 심히 불안해졌다. 이 틈을 타서 왕권에 야심을 갖는 자들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한산후(漢山侯) 윤(昀)을 옹립하여 세력을 잡으려는 이자의 일파와, 문종의 아들이자 선종의 동모제(同母弟)인 계림공(鷄林公) 희(熙) 사이에서 왕위 계승을 두고 갈등하게 되었다. 이자의는 한산후 윤을 왕위에 앉히기 위하여 군사를 양성하여 무력으로 큰일을 일으키려고 하였으나, 계림공 희가 평장사(平章事) 소태보(邵台輔)와 상장군(上將軍) 왕국모(王國髦)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 이자의와 그 일당을 제거하였다. 그리고 헌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숙종(肅宗)으로 즉위하였으며, 이후 인주 이씨를 견제하는 자세를 지켰다.
그러나 숙종의 이러한 자세에도 외척으로서의 인주 이씨의 세력은 크게 위축되지 않았으며, 예종(睿宗)·인종(仁宗) 대에 이자겸을 중심으로 다시 나타나게 되었다. 이자겸은 예종에게 문경 태후(文敬 太后)를 왕비로 맞아 인종을 낳게 하였고, 다시 두 딸을 인종에게 왕비로 맞게 해 세력을 형성하였다. 이자겸은 ‘십팔자위왕(十八子爲王)[이씨가 왕이 된다는 뜻으로, 한자 이(李)를 해체하면 십팔자(十八子)로 나뉜다]’의 도참설을 믿고, 인종의 비가 된 그의 네 번째 딸을 시켜 독약으로 인종을 시해하려고도 하였으며, 척준경(拓俊京)과 더불어 변란을 획책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실패하였다.
그런데 인주 이씨 가문이 이러한 행동을 했음에도, 인주 이씨 가문은 외척으로서의 지위를 어느 정도 유지하였던 것 같다. 충선왕은 왕실과 결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가문을 재상지가(宰相之家)로 정하였는데, 인주 이씨가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고려 후기 인주 이씨 가문의 지위를 설명해 준다고 할 수 있다.
2. 부평 이씨
또, 인천 지역의 호족으로 부평 이씨(富平 李氏)[계양(桂陽) 이씨]를 들 수 있다. 『부평 이씨 대동보(富平李氏大同譜)』에 의하면, 부평 이씨의 시조는 이희목(李希穆)으로서 고려를 세운 태조의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워 삼한 벽상 공신(三韓 壁上 功臣)으로 책봉되었으며 벼슬의 등급은 삼중대광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부평 이씨 대동보』의 「시조 삼중대광 공사적(始祖三重大匡公事蹟)」 속에서 지적하였듯이 『고려사(高麗史)』 속에서 그 이름을 찾아볼 수 없으니 확실한 것은 알 수가 없다.
부평 이씨가 크게 이름을 떨친 것은 이희목의 3세손으로 짐작되는 이정공(李靖恭)과 그의 아들 이숙(李璹)·이위(李瑋)·이순(李珣) 대의 일이다. 『고려사』의 「이숙전(李璹傳)」에 의하면 이정공은 선종 3년(1086)에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렀으며, 숙종 4년(1099)에 세상을 떠나자 왕이 조위(弔慰)와 뇌서(誄書)를 내렸다고 한다. 예종 2년(1107)에는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하고 순종 묘정(順宗廟庭)에 배향되었다.
이정공의 세 아들이 모두 이름을 떨쳐 맏이인 이숙의 벼슬은 예부 상서 참지정사에 이르렀고 둘째 아들 이위의 벼슬은 문하시중에 이르렀으며 셋째 아들 이순도 벼슬이 문하평장사에 이르렀다. 특히 이위는 예종 때에 좌리공신에 책록(冊錄)되었으며 예종 12년(1117)에는 계양백(桂陽伯)에 봉해졌다. 벼슬을 그만둔 후 계양공에 봉해지고 광국공신에 책록되었다. 그의 외손녀 공예 태후(恭睿太后) 임씨가 1127년(인종 5)에 인종의 비로 책봉된 후 중서령이 더해지고 진정공신에 책록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