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05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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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起龍 |
영어공식명칭 | Jeong Gi Ryong |
이칭/별칭 | 정무수(鄭茂壽),경운(景雲),매헌(梅軒)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강식 |
[정의]
조선 전기 밀양부사를 역임한 무신.
[가계]
정기룡(鄭起龍)[1562~1622]의 본관은 곤양(昆陽)이며, 자는 경운(景雲), 호는 매헌(梅軒)이다. 본래 이름은 정무수(鄭茂壽)였다. 증조할아버지는 증호조참판(贈戶曹參判) 정철석(鄭哲碩), 할아버지는 증호조판서(贈戶曹判書) 정의걸(鄭義傑)이다. 아버지 정호(鄭浩)와 어머니 남양홍씨(南陽洪氏) 사이의 3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첫째 부인은 임진왜란 때 진주성(晉州城)이 함락되자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쓰고 촉석루(矗石樓)에서 투신한 진주강씨(姜氏)이다. 사별 후 선전관(宣傳官) 권홍계(權弘啓)의 딸 예천권씨(禮泉權氏)와 혼인하였다.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정기룡은 1562년 곤양군 금양면[현재의 하동군 금남면]에서 출생하였다. 1580년(선조 13) 고성에서 향시(鄕試)에 합격한 후, 1586년(선조 19) 무과 별시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무과에 급제한 뒤 국왕 선조(宣祖)의 명에 따라 원래 이름 정무수 대신 정기룡(鄭起龍)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590년(선조 23)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였던 신립(申砬)의 휘하에 들어갔으며, 1591년에 훈련원봉사(訓鍊院奉事)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별장(別將)으로서 우방어사(右防禦使) 조경(趙儆) 휘하로 들어갔으며, 금산(錦山) 전투에서 포로가 된 조경을 구출하였다. 이어 곤양수성장(昆陽守城將)으로서 일본군의 호남 진출을 방어하였으며, 유병별장(遊兵別將)을 거쳐 상주판관(尙州判官)이 된 후 격전 끝에 상주성을 탈환하였다.
1593년에는 회령부사를 맡게 되었으며, 다시 1594년 상주목사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고령, 성주, 합천, 초계, 의령 등지에서 잇달아 승리를 거두어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올랐으며, 뒤이어 경주와 울산을 일본군으로부터 수복하였다. 1598년 함양 사근역 전투를 지휘하던 명나라 장수 부총병(副總兵) 이녕(李寧)이 전사하자, 정기룡이 이녕의 역할을 대행하여 명나라 병사들을 수습하였으며, 경상도 지역의 나머지 일본군을 소탕하였다. 다만 정기룡과 함양 사근역 전투에 참여한 명나라 장수는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다. 신도비명에는 총병관(總兵官) 이절(李梲), 『매헌실기』에는 부총병 이절로 기록하고 있으나, 『선조실록』에는 부총병 이녕으로 기록하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경상도 방어사를 역임하였다. 1602년 김해부사를 거쳐 1604년 밀양부사로도 재임하였으며, 1605년 중도 방어사를 겸직하였다. 정기룡에게 가선대부(嘉善大夫) 품계를 내리며 밀양부사를 제수하는 교지(敎旨)가 유물로 전한다. 또 동강(東江) 신익전(申翊全)이 밀양부사로 재직하던 1652년 집필한 읍지 『밀양지(密陽志)』에서 밀양의 지방관 중에 치적과 공적을 확인할 수 있는 뛰어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정기룡을 언급하면서 ‘청정비(淸政碑)’가 건립된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정기룡은 밀양을 떠난 이후에도 용양위부호군 겸 오위도총부총관(龍驤衛副護軍兼五衛都摠副摠官), 경상좌도병마절도사 겸 울산부사 등 중요한 외관직을 두루 거쳤다. 1617년 삼도수군통제사 겸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에 올라 1622년에 통영에서 재직 중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후손들이 정기룡의 사적을 정리하여 1747년 간행한 『매헌실기(梅軒實記)』가 전한다.
[묘소]
경상북도 상주시 사벌면 금흔리에 안장되었으며, 사당인 충의사의 동쪽 편에 묘소가 위치하고 있다.
[상훈과 추모]
정기룡은 임진왜란 때의 공훈을 인정 받아 1605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이후 숙종 연간부터 후손들에 의한 현창 사업이 전개되었는데, 1700년(숙종 26) 송시열(宋時烈)이 찬술한 비문으로 묘소 인근에 신도비를 건립하였다. 1772년(영조 48) 말 조정에서 정기룡에 대한 시호(諡號) 추증 논의가 이루어졌으며, 이듬해인 1773년 충의공(忠毅公)이라는 시호가 내렸다. 1931년부터 곤양 지역 일대의 유지들이 사우를 건립하고자 ‘모충계(慕忠契)’를 조직하였는데, 그 결과 1935년 경충당(景忠堂)[현재의 경충사]이 현재의 하동군 금남면에 건립되었다. 후손들에게 전해진 정기룡 유물 6점이 1980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정기룡의 묘소가 위치한 상주의 정기룡 유적지가 1974년 경상북도 기념물[제13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정기룡의 생가터와 경충사가 위치한 하동의 정기룡 장군 유허지는 1991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제188호]로 지정되었으며, 소장 유품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제286호]로 지정되었다.
매년 5월 24일 출생을 기념하는 ‘탄신기념문화제’가 개최되고 있다. 기념문화제 더불어 2012년부터 ‘정기룡 장군배 전국 승마대회’와 ‘충의공 정기룡 장군 전국 서예·문인화 대전’도 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