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축관이 축을 읽고 함께 절을 한 다음에는 가장 중요한 소지를 올릴 차례가 된다. 소지는 마을의 대동소지부터 먼저 올리고 이장소지, 각반의 반원의 소지를 반장이 올린다. 이것을 시작으로 제관들과 여러 마을의 대표들이 각 가정의 소망을 이야기 하며 소지를 태워 올리는데, 이때는 크게 소리내어 소원을 빈다. 마을사람들의 다양한 소원을 담아 올리는 소지는 완전하게 잘 타올라야 소원 성취가...
-
일제의 압박 속에서도 꿋꿋하게 전통을 이어갔던 주곡리 장승은 해방 후에 급속도로 산업화되는 사회가 전개되면서 새로운 위기를 맞았다. 1970년대에 접어들자 우리나라는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었고 전근대적 미신 타파, 부락제의 경비 절감으로 인해 수많은 마을 장승들은 급격히 소멸되어 갔다. 이러한 세태 속에서 주곡리 장승 또한 온전히 그 모습을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곡리에서...
-
여느 마을들과 마찬가지로 61세가 되면 주민들은 노인회에 가입을 한다. 남자들은 노인회에, 여자들은 안노인회에 가입을 하는데, 워낙에 마을에 젊은 사람이 없기 때문에 마을사람 대부분이 노인회 회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인회에서는 마을회관 관리나 마을 길 청소 등 여러 가지 일들을 한다. 그러나 주곡리 노인회의 진정한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 하나 있으니 바로 ‘노제(路祭)’이다...
-
오랜 세월동안 꿋꿋하게 전통을 이어온 주곡리 장승제는 과거 존폐와 관련하여 두 번의 큰 위기를 맞았었다고 한다. 바로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0년대와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1970년대의 일이었다. 일제강점기에도 주곡리에서는 매년 6기의 목장승(4기)과 짐대(2기)를 깎아 세웠으나, 일제는 삼림법을 엄하게 적용하여 장승목으로 쓸 나무를 벌목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매년 새 나무로 장...
-
주곡리 마을에서 양산계곡을 찾아 깊숙이 들어가면, 널찍한 바위 위에 선명한 글씨가 새겨진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바위 위의 글씨를 자세히 살펴보면 ‘삼우대 대공수자류(三友臺, 臺空水自流)’라고 쓰여 있는데, 예전에는 바위 한가운데에 맑은 물이 솟아났다고 한다. 마을 속 깊은 계곡 바위 글씨에는 벌써 천 년 전의 전설이 함께 내려져 오고 있다. 고려 초에 일어난 일이다....
-
주곡리는 계룡산 줄기에 기대어 주변의 산이 마치 삼태기 같은 모습으로 마을을 포근히 감싸 안고 있다. 마을 입구 방죽에는 소나무와 느티나무 숲이 살짝 마을 안을 가려주어 안온한 분위기를 더해 준다. 마을 앞으로는 풍요로운 농토가 펼쳐있고, 갑사 계곡에서 흘러나온 노성천이 유유히 흐른다. 오랜 전통을 간직한 주곡리는 그 전통과 역사성 덕분에 논산의 역사마을로 선정되기도 하...
-
주곡리 장승제는 논산시 향토유적 제2호로 선정된 유래 깊은 전통행사이다. 그러나 장승제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근거는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오랫동안 마을에서 두 가지의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그 하나는 조선 중종 연간에 청주양씨 첨정공 양춘건(楊春健)이 인근 신도내에서 숯골로 이사한 후, 동구 밖에 장승을 만들어 놓고 나라의 안정과 마을수호를 위해 제를 지내...
-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개관한 ‘농협중앙회 농업박물관’에서는 「神農遺業」(신농유업)이라는 글자가 크게 쓰인 농기가 있다. 이 농기의 크기는 가로 240cm, 세로 360cm 정도이며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 깃대는 그 높이가 무려 15~17m에 이르렀다고 하니, 당시 농번기마다 들썩였을 두레의 규모를 상상해 볼 만하다. 1906년에 만들어졌다는 바로 이 농기가 다름 아닌 주곡리 마을 두...
-
장승배기와 우물을 청소하고 금줄을 치는 동안, 톱을 든 마을사람 양성직 씨와 몇 해 전부터 장승 깎는 일을 도와주고 있는 문화재 조각 기능인 김태길 씨를 필두로 마을 청년들 몇몇이 장승으로 쓰일 나무를 베러 간다. 원래는 나무를 고를 때에도 소나 말, 닭 또는 개 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까지 깊숙이 찾아 들어가 적당한 곳에 다다르면 술 한 잔을 붓고 엄숙하게 기도를...
-
주곡리의 윗뜸, 아랫뜸, 망가리는 청주양씨(淸州楊氏), 함평이씨(咸平李氏), 전주이씨(全州李氏)의 터전이기도 하다. 주곡리에 처음 터를 잡은 것은 윗뜸의 청주양씨로 전해지는데 입향조인 첨정공 양춘건이 중종 연간에 신도내에서 이곳 주곡리로 이주해왔다고 한다. 그 후, 터를 잡고 살던 청주양씨와의 혼인으로 인해 함평이씨와 전주이씨가 각각 주곡리에 들어와 아랫뜸과...
-
주곡리에 함평이씨가 처음으로 살기 시작한 것은 함평군 이사길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사길이 언제 어떠한 이유로 양주에서 주곡리로 들어와 살게 된 것인지 현재로서는 정확히 알 수가 없으며, 후손들에게도 전해지는 바가 없다. 다만 이사길이 청주양씨 양여필(楊汝弼, 1616~1677)의 사위라는 점만이 그의 입향을 추측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로 아마도 처향을 따라 주...
-
이장 양현직 씨는 말했다. “안 힘드냐고? 힘들지, 그래도 하면 좋아, 바쁘고 귀찮아도 다들 알아주니께...” 이장은 행정구역의 최말단인 ‘리(里)’를 대표하여 모든 마을 일을 맡아보는 마을 대표이다. 양현직 씨(61)는 주곡리 15대 이장으로 마을 안팎으로 사람 좋기로 소문이 나있다. 60세 이하의 주민이 거의 없는 주곡리로서는 그나마 젊은 편에 속하는 양현직 씨가 행정업무와 모...
-
주곡리 전주이씨의 입향 과정에 대해서는 대체로 청주양씨와의 혼인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전하나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취 등 선대의 묘역이 경기도 고양, 양주 일대에 있다가 이취의 고손자인 이만근(李萬根, 1658~?)의 묘가 주곡리에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1600년대 후반 이후 터를 잡고 살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
주곡리는 논산시 북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조선시대에는 마을로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 동서로 주막거리가 형성될 정도로 북적이던 곳이라고 하지만, 지금은 버스도 하루에 다섯 번 밖에 찾지 않을 만큼 한적한 시골마을이다. 자가용으로 마을에 들어가는 길은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논산에서 공주로 향하는 국도 23호선를 따라 약 11㎞정도 가다 보면, 노성면...
-
장승제를 치르기 열흘 전, 마을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풍물을 치고 집집마다 다니며 풍장굿을 한다. 이때가 되면 마을 사람들은 모두 문을 열어 환영한다. 풍장굿을 하러 다니는 사람들은 장승제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걸립을 하는 것인데, 일종의 공동경비를 마련하기 위한 모금활동인 것이다. 요즘에는 객지로 나간 사람들이나 농사를 짓지 않고 사업을 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이들도 이때가...
-
이방헌 씨가 전해주는 주곡리 장승의 유래는 고려 말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옛날 마을에 장정승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천하일색으로 널리 소문난 강충신의 부인을 호시탐탐 탐을 내었다. 그러던 중 멀리 중국에 사신으로 가게 된 장정승이 강충신의 부인을 가로채고자 마음먹고 강충신을 자신을 돕는 부사로 함께 가게 하였다. 욕심에 눈이 어두워진 장정승은 결국 강충신의 목숨을 빼앗...
-
대부분의 주민들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 주곡리에서는 특히 1980년대부터 딸기재배가 도입되어 마을의 주된 환금작물로 자리를 잡았다. 딸기 심어 대학 보낸다고 할 정도로 한때는 수익률이 높았던 작물이었기 때문에 금방 확산이 되어 대부분의 농가에서 벼농사와 딸기재배를 함께 하고 있다. 한 동네에서 한두 가지 특수작물을 재배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중에서도 혼자 토마토를 키우며 토마토를...
-
향다실 건너편에는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묻어나는 오래된 건물이 있다. 거리의 풍경은 몰라보게 변했지만 이 건물만은 예전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협동이용원’이라는 낡은 간판을 걸어놓은 이용원이다. 이 건물은 겉도 겉이지만 50년의 세월을 그대로 간직한 안의 모습은 마을을 사람들과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협동이용원’은 육곡리 최초로 생긴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