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7002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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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陟浦萬戶 |
영어공식명칭 | Samcheokpo Manho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관직 |
지역 | 강원도 삼척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배재홍 |
[정의]
고려시대 삼척 지역의 만호부 무관 벼슬.
[개설]
고려 때인 1384년 왜구 방비를 위하여 삼척포에 만호를 두었다. 삼척포 만호는 삼척군의 지군사가 겸임하고, 소속 수군인 기선군(騎船軍)을 통솔하였다. 만호는 조선시대 때까지 운용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만호(萬戶)는 고려·조선시대 때 외적의 침입을 방어할 목적으로 설치된 만호부(萬戶府)의 무관 벼슬이다. 만호는 원나라에서 들어온 제도이며, 지방에 처음 설치된 것은 고려충렬왕 때인 1281년(충렬왕 7)이다. 당시 원나라는 일본 정벌에 실패한 후 왜구 침입에 대비하여 남해안 요충지에 만호부를 설치하고 만호를 두었다.
이후 왜구 등 외적의 침입이 예상되는 연해와 해도(海島) 지역에 만호부를 설치하고 만호로 하여금 방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특히 1374년(공민왕 23)에는 수군(水軍)이 창설되면서 도만호, 만호, 부만호 등 직제가 마련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1384년(우왕 10)에 왜구 방비를 위하여 삼척포(三陟浦)에도 만호가 설치되었다.
[담당 직무]
삼척포에 만호를 둔 것은 왜구의 빈번한 동해안 침입으로 말미암아 군사 요충지로서 삼척 지역의 중요성이 부각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서 만호의 가장 중요한 직무는 왜구 방비였다. 1385년(우왕 11)에 왜구가 동계(東界)에 침입하였을 때 남은(南誾)[1354~1398]은 스스로 삼척포 만호 겸 삼척군 지군사(知郡事)가 되기를 자원하였다. 이에 따라 남은은 1386년(우왕 12) 2월 삼척에 부임하였으며, 마침 삼척 지역에 침입한 왜구를 크게 격파하였다.
[관련 기록]
허목의 『척주지』에는 1384년 처음으로 삼척진에 만호를 두었으며, 3년 후인 1387년에 지군사 남은이 만호를 겸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남은이 1385년에 삼척포 만호 겸 지군사가 되기를 자원하여 와서 이듬해에 왜구를 물리쳤다고 하였다.
『척주선생안』에는 삼척포 만호 겸 지군사로 온 지방관의 이름과 부임·이임 연월이 기록되어 있다.
[변천]
삼척포 만호는 조선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존속하였으며 삼척도호부 도호부사가 겸하였다. 조선시대 만호는 서반(西班) 외관직이었으며, 품계는 처음에 3품이었다가 나중에 종4품으로 되었다. 그러나 1419년(세종 1) 8월 강원 감사의 건의로 도호부사가 겸임하던 만호를 폐지하고 수군 전임 지휘관인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를 두기로 하였다.
그러나 1462년(세조 8) 9월 병조에서 삼척포는 군사 요충지로서 부사가 수군과 육군을 겸하여 다스려야 하니 사변이 일어나면 대처하기 어렵다면서 만호 설치를 건의하였다. 여기에 세조도 동의하여 당시 폐지된 연곡포(連谷浦) 만호 황기강이 삼척포 만호로 옮겨 왔다. 이로써 삼척포 진은 첨절제사 진영에서 다시 만호 진영으로 격하되었다. 그 후 진관(鎭管) 체제가 완성된 후인 1468년(세조 14)에 다시 만호를 폐지하고 수군첨절제사를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