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7004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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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龍山書院靑衿錄 |
영어공식명칭 | Yongsanseowon Cheonggeumrok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강원도 동해시 쇄운동 산238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배재홍 |
[정의]
조선시대 삼척도호부에 속하여 있던 용산서원의 동재유생 명단.
[개설]
용산서원은 숙종 대에 삼척부사를 지낸 이세필을 제향하는 서원이다. 이 용산서원의 동재유생 명단인 청금록에는 1708년 10월부터 1755년 8월까지 총 18회에 걸쳐 선발된 유생 129명의 이름이 신상 정보와 함께 기록되어 있다.
[용산서원 연혁]
용산서원(龍山書院)은 1703년(숙종 29) 12월부터 1705년(숙종 31) 9월까지 삼척부사를 지낸 구천(龜川)이세필(李世弼)[1642~1718]을 제향하는 미사액 서원으로, 서당에서 출발하여 서원으로 체제를 전환하였다. 용산서당은 이세필이 삼척 지역 재지사족 8명과 결합하여 1705년 6월에 건립하였다.
이세필이 1705년 9월에 삼척 지역을 떠나자 재지사족들은 서당에다 생사당을 건립하고 진상(眞像)을 봉안함으로써 사실상 서원 형식을 갖추었다. 그 후 1718년(숙종 44)에 이세필이 사망하자 이듬해인 1719년(숙종 45) 8월에 위판을 봉안하고 현판을 용산사(龍山祠)로 교체함으로써 완전히 서원 체제로 전환하였다. 이렇게 건립된 용산서원은 조선 후기 삼척 지역의 대서원이자 사족들의 유대와 결속을 다지는 중심 기구, 향촌 지배 기구로서의 기능을 다하다가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청금록을 통해 본 동재유생 성분]
용산서원의 동재유생(東齋儒生) 명단인 청금록(靑衿錄)은 『용산서원지』에 실려 있다. 청금록에는 1708년(숙종 34) 10월부터 1755년(영조 31) 8월까지 약 47년 동안 총 18회에 걸쳐 선발한 동재 유생 129명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이름뿐만 아니라 그들의 본관, 초명(初名), 개명(改名), 출생 연도, 혈연 관계, 전력(前歷) 등도 표기되어 있다.
청금록을 보면 추록(追錄)은 정기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1회 추록에서 입록자 수는 1명부터 16명까지 다양하였다. 입록자는 모두 유학층(幼學層)이었다. 입록자 나이는 20대가 주류를 이룬 가운데 30대, 10대 후반, 40대 전반 순이었다.
한편 청금록 입록자들은 9개의 삼척 지역 양반 사족 성관 출신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가운데 남양홍씨가 가장 많았다. 그다음으로 강릉최씨, 강릉김씨, 삼척김씨, 영일정씨, 전주최씨, 공주이씨, 강릉박씨, 안동권씨 순이었다. 이러한 성관 가운데에서도 더욱 많은 입록자를 배출한 특정 가문들이 있었다.
그러나 18세기 전반에 작성된 청금록에는 당시까지 삼척 지역에서 자타가 공인하던 치향지인(治鄕之人)이 아니라 새롭게 떠오른 세력이 다수 입록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1775년(영조 51) 8월의 추록을 마지막으로 청금록 입록을 중단하고 1776년(영조 52) 3월부터 새로이 임록(任錄)을 작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