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7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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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慶州偰氏三節四賢遺墟碑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금과면 남계리 266[호치 마을]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진돈 |
건립 시기/일시 | 1913년 - 경주 설씨 삼절 사현 유허비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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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경주 설씨 삼절 사현 유허비 현 소재지 - 전라북도 순창군 금과면 남계리 266[호치 마을] |
성격 | 비 |
양식 | 좌대와 개석을 갖춘 비석 |
관련 인물 | 설보신(偰普莘)|희태(希台)|설문질(楔文質)|설손(偰遜)|설장수(偰長壽)|설경수(偰慶壽)|설순(偰循) |
재질 | 화강암 |
크기(높이,너비,두께) | 좌대 93㎝[높이]|59㎝[너비]|5㎝[두께], 비신 49㎝[높이]|21㎝[너비]|142㎝[두께], 개석 82㎝[높이]|55㎝[너비]|36㎝[두께] |
소유자 | 경주 설씨 종친회 |
관리자 | 경주 설씨 종친회 회장 설재정[652-6215] |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금과면 남계리에 있는 일제 강점기 경주 설씨 문중의 삼절과 사현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
[개설]
경주 설씨 삼절 사현 유허비(慶州偰氏三節四賢遺墟碑)는 경주 설씨의 삼절 사현(三節四賢)을 기록한 비석이다. 경주 설씨는 회골계(回鶻系)[위구르족]의 귀화 성씨이다. 원나라에서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설손(偰遜)이 난을 피해 1358년(공민왕 7) 고려에 귀화하였다. 삼절(三節)은 중시조격인 설보신(偰普莘)과 부인 희태특늑(希台特勒), 아들 설문질(偰文質)이고, 사현(四賢)은 조선 초 위화도 회군에 중추적 역할을 한 설장수(偰長壽)[1341~1399]의 아버지 설손(偰遜)과 설장수, 설장수의 동생 설경수(偰慶壽), 설경수의 아들 설순(偰循)이다. 현재 경주 설씨 삼절 사현 유허비는 삼절 사현의 묘소가 대부분 실전되었기 때문에 단비(壇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건립 경위]
경주 설씨 삼절 사현 유허비는 경주 설씨 문중에서 호남의 대학자인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1846~1916]에게 글을 부탁하여 1913년 계축 양월에 세웠다.
[위치]
순창에서 담양 가는 길을 가다 방축 마을에서 좌회전하면 금과 농협이 나온다. 금과 농협에서 우회전하여 야트막한 산길을 넘으면 남계교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논길을 따라 올라가다 바로 좌회전하여 호사교를 통과하면 순창군 금과면 남계리 호치 마을이 나온다. 호치 마을 중앙에 사당 호계사(虎溪祠)가 있고, 뒤쪽에 경주 설씨 삼절 사현 유허비가 있다. 주소지는 경주 설씨의 집성촌인 순창군 금과면 남계리 266번지이다.
[형태]
비석은 좌대(座臺), 비신(碑身), 개석(蓋石)을 모두 갖추고 있다. 비의 크기는 좌대 높이 93㎝, 너비 59㎝, 두께 5㎝이고, 좌대는 3단으로 되어 있다. 비신은 높이 49㎝, 너비 21㎝, 두께 142㎝이며, 개석은 높이 82㎝, 너비 55㎝, 두께 36㎝이다. 비석 앞에는 제물을 올리는 넓은 상석(床石)이 있다. 일반적으로 유허비 앞에는 제단이 없는데, 경주 설씨 삼절 사현 유허비에서는 매년 제물을 차리고 예를 올린다고 한다. 들어가는 입구에는 기둥을 세우고 작은 문을 만들었으며, 사방은 높은 담을 둘렀다.
[금석문]
경주 설씨 삼절 사현 유허비는 기우만이 찬하였으며, 전면 글씨는 해서로 썼다. 음기(陰記)는 삼절과 사현의 공적 내용을 기록하였다.
[현황]
경주 설씨 종친회에서 소유하여 관리하며, 매년 음력 3월 5일 제사를 지낸다.
[의의와 평가]
경주 설씨 삼절 사현 유허비는 순창의 경주 설씨 문화유적 중에서 호계사와 함께 매우 중요한 성격을 갖는다. 호남의 대학자인 기우만이 글을 썼을 뿐 아니라, 비석의 내용에 조선 건국에 참여한 설장수, 월력을 만드는 데 많은 공헌을 한 설경수 등이 나타난다. 또 이러한 역사적인 비석 앞에 매년 진설을 한 후 제사 지내는 것은 향토 사적으로 중요하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