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8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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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淳昌薛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성용 |
입향 시기/일시 | 1126년 - 순창 설씨 입향조 설자승 순창 입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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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거|집성지 | 순창 설씨 세거지 - 전라북도 순창군 금과면 동전리 |금과면 고례리|금과면 내동리|쌍치면 양신리 |
성씨시조 | 설호진(薛虎珍) |
입향시조 | 설자승(薛子升) |
[정의]
설호진을 시조로 하고 설자승을 입향조로 하는 전라북도 순창군 세거 성씨.
[개설]
순창 설씨(淳昌薛氏)는 설호진(薛虎珍)을 시조로 하고, 본관을 순창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순창 설씨는 순창의 토착 성씨로 1126년(인종 4) 설자승(薛子升)이 처음 구림면 율북리에 들어와 정착한 이후 그 후손이 금과면 동전리와 고례리, 내동리 내동 마을 및 쌍치면 양신리 양사 마을에 이거하여 누대로 세거하고 있다. 2000년 통계청의 인구 조사 자료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총 8,607가구, 2만 7926명이 거주하고 있다.
[연원]
순창은 원래 백제의 도실군(道實郡) 지역이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757년(경덕왕 16) 순화군(淳化郡)으로 바뀌었고, 940년(고려 태조 23) 순창으로 이름을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설씨의 기원은 신라가 생기기 이전인 기원전 57년 박혁거세(朴赫居世) 탄생 설화에 나오는 6촌장의 한 사람인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현 경상북도 경주시 천북면 일대]의 설호진[일명 설거백(薛居伯)]으로 올라간다. 설호진은 5촌장과 함께 박혁거세를 신라 초대 왕으로 추대하였고, 32년(유리왕 9) 6촌이 6부로 개칭되고 명활산 고야촌이 습비부(習比部)가 되면서 설성(薛姓)을 하사받았다. 그 후 14세손 설곡(薛嚳)이 습비후에 봉해지고, 습비가 경주에 속하면서 본관을 경주로 하였다.
36세손 설자승이 1124년(인종 2) 예부 시랑으로 순화백(淳化伯)[순화는 전라북도 순창의 옛 이름]에 봉해지자 본관을 순창으로 고쳤으나, 설귀창을 파조로 하는 개성파는 원래의 경주를 본관으로 하였다. 그러므로 경주가 원적이 되고, 순창이 본적이 되는 것이다. 설호진은 516년(법흥왕 3) 무신공(武信公)으로 증시(贈諡)[사시(賜諡)라고도 하며, 친척이나 고향 사람 또는 제자들이 시호를 올리는 것을 말함]되었고,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 때 장무왕(壯武王)에 추봉되었다. 1954년 음력 8월 17일부터 제사를 지내고 있는데, 이것이 신라제이다.
[입향 경위]
설자승이 1126년 이자겸(李資謙)의 난을 피해 아내의 고향인 순창으로 낙향하였다. 처음에는 지금의 구림면 율북리로 들어와 살았다. 고려 시대 8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는데 모두 중앙 정계의 요직을 차지하였다. 그 가운데 설신(薛愼)은 추밀원 부사를 지냈다. 설신의 아들 설공검(薛公儉)은 문과에 급제하여 지첨의 부사, 찬성사를 지냈다. 설공검의 아우 설인검(薛仁儉)도 문과에 급제하여 평장사에 이르렀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설응(薛凝)의 아들 설위(薛緯)가 1419년(세종 1)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성을 지냈고, 설위의 조카 설계조(薛繼祖)는 세조(世祖)를 도와 정난공신(靖難功臣)에 녹훈되고 벼슬이 좌찬성에 이르렀다.
설위는 처음 금과면 마곡 마을로 이거하였다가 다시 지금의 금과면 동전리로 이거하여 동전 설씨(銅田薛氏)라고 불렸다. 설위의 아들 설갑인(薛甲仁), 손자 설충수(薛忠壽), 증손자 설공성(薛公成)이 모두 진사에 합격하였다. 남파(南坡) 설진영(薛鎭永)은 1895년(고종 32) 명성 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자 기우만(奇宇萬)을 따라 의병을 일으켜 전라남도 장성과 나주 등지에서 왜병과 싸웠다. 1910년 국권을 강탈당하자 아미산 남쪽 기슭에 남파 서실(南坡書室)을 짓고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 힘써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1940년 일제의 창씨개명 강요를 거부하고 우물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금과면 내동리는 동전리에서 살았던 설위의 후손 한 가닥이 이거하여 집성촌을 이루었다. 또한 금과면 고례리도 설씨 집성촌인데, 고례리의 입향조는 동전리의 입향조인 설위의 형 설훈(薛纁)의 아들인 설순조(薛純祖)이다. 설순조는 무과에 급제하여 제주 목사를 역임하였다. 쌍치면 양신리 양사 마을도 설씨의 집성촌으로, 금과면 동전 마을에서 갈라져 나온 설위의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다.
[현황]
2000년 11월 1일 현재 순창 지역 순창 설씨는 154가구, 349명이 살고 있다. 1989년 순창군에서 실시한 인구 통계 자료에 따르면 순창 설씨는 금과면 동전리 동전 마을에 19가구, 금과면 고례리 고례 마을에 15가구, 금과면 내동리 내동 마을에 22가구가 집성촌을 이루며 세거하고 있다. 또한 쌍치면 양신리 양사 마을에 23가구가 누대로 살아오고 있다. 2010년에 발간한 『금과 향지』에 따르면, 당시 금과면에 살고 있는 순창 설씨는 84가구로 동전리 동전 마을에 15가구, 고례리 고례 마을에 10가구, 내동리 내동 마을에 15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관련 유적]
전라북도 순창군 금과면 동전리 25번지에 있는 설진영 서실(薛鎭永書室)은 1998년 1월 9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96호로 지정되었다. 동전 마을 어귀에 순창 설씨 후예들이 풍수지리상 비보의 목적으로 입석 2기를 세웠는데, 지금은 1기만 남아 있다. 또한 보물 제728호로 지정된 설씨 부인 권선문(薛氏夫人勸善文)이 있다. 설씨 부인 권선문은 조선 단종(端宗) 때부터 성종(成宗) 때까지 문신으로 활약한 신말주(申末舟)의 부인 설씨가 선(善)을 권장하는 내용을 담아 쓴 글과 그림이 있는 문서로, 조선 시대 여류 문인이 쓴 필적으로는 가장 오래되었다. 현재 국립 전주 박물관에서 관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