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8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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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興德張氏 |
이칭/별칭 | 흥성 장씨(興城張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성용 |
세거|집성지 | 흥덕 장씨 세거지 - 전라북도 순창군 동계면 수정리 |동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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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시조 | 장유(張儒) |
입향시조 | 장경세(張經世) |
[정의]
장유를 시조로 하고 장경세를 입향조로 하는 전라북도 순창군 세거 성씨.
[개설]
흥덕 장씨(興德張氏)는 장유(張儒)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흥덕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순창 지역 흥덕 장씨는 사촌(沙村) 장경세(張經世)가 동계면 수정리에 조상의 여묘살이를 위해 들어온 것을 계기로 그 후손이 집성촌을 이루며 세거하여 왔다. 또한 동계면 동심리 흥덕 장씨는 수정리에서 나간 가닥이다. 2000년 통계청의 인구 조사 자료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1만 4023가구, 4만 4705명이 거주하고 있다.
[연원]
흥덕은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일대를 말한다. 백제 때는 상칠현(上漆縣) 또는 상촌현(上村縣)이라 하다가 757년(경덕왕 16) 상질현(尙質縣)으로 고쳐 고부군(高阜郡)에 부속시켰다. 1018년(현종 9) 이후 장덕현(章德縣) 혹은 창덕현(昌德縣)으로 고쳐 감무를 두고 고창을 아울러 다스리게 하였다가 1308년(충선왕 1) 흥덕으로 바꾸었다. 1401년(태종 1) 고창현을 분리하고 흥덕현으로 독립하였으며, 흥성현(興城縣)이라고도 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 제도 개정으로 전주부 흥덕군이 되었고, 1896년 전라남도 흥덕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흥덕면으로 축소되어 고창군에 통합되었다.
흥덕 장씨 시조는 영주 상질현(尙質縣)[상질은 흥덕의 옛 이름] 출신으로 고려 시대에 광평시랑(廣評侍郞)을 지낸 장유(張儒)이다. 그는 신라 후기 난을 피해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어를 배웠고, 고려 태조(太祖)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 환국하여 광종(光宗) 때 예빈성에 있으면서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일을 맡았다. 시조 장유가 나고 자란 상질현이 흥성으로 바뀌고, 그의 6세손 장기(張機)가 흥산군(興山君)[흥산은 흥성의 다른 이름]에 봉하여지자 후손들이 본관을 흥성으로 하였는데, 흥성이 흥덕으로 바뀜에 따라 흥덕을 본관으로 하였다.
장유의 아들 장연우(張延祐)는 고려 현종(顯宗) 때 거란군이 침입해 오자 왕을 호종하였고, 중추원사와 호부 상서를 역임하였다. 뒤에 상서우복야에 추증되었다. 고창군 성내면에 장연우의 제각과 신도비가 있다. 금구 현감을 지낸 장경세는 충군애국을 노래한 「강호 연군가(江湖戀君歌)」 12곡을 지었다. 조선 시대 8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입향 경위]
흥덕 장씨는 본래 전라북도 남원에서 오래 전부터 살아 온 토성인데, 수정리도 옛날 남원 땅이었기에 남원의 흥덕 장씨라고 한다. 동계면 수정리의 흥덕 장씨는 1589년(선조 22) 문과에 급제하여 금구 현령을 역임하고 「강호 연군가」를 지어 유명하게 된 장경세의 후손이다. 수정리에는 지금 장경세의 홍패 등 문화재 가치가 있는 문서가 보존되어 있다. 장경세는 본래 남원의 주생면에서 태어났는데, 장경세의 손자 때 수정 마을로 이거하여 들어왔다. 장경세는 1786년(정조 10) 주암 서원(舟巖書院)에 배향되었다. 주암 서원은 1975년 2월 26일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21호로 지정되었으며, 전라북도 임실군 지사면 방계3길 46에 자리 잡고 있다. 동계면 동심리의 흥덕 장씨 입향조와 입향 연대는 알 수 없다.
2011년에 발간한 『동계 면지』에 의하면, 고려 후기 장헌(張軒)은 현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에 침입한 왜구 소탕에 공을 세워 조선 태조(太祖) 때 영광 군사, 낙안 군사를 지냈고 두계리, 남창리 주변의 토지를 하사받고 흥덕에서 남원으로 이거하였다. 장헌의 아들 장합(張合)은 상서원 별감, 제주 판관을 역임하고 통훈대부 선공감정이 되었으며 남원시 대산면 신원동 일대의 산야를 분급받았다. 장합의 아들 장윤신(張允愼)은 세조(世祖) 때 3등 공신에 녹훈되고 기장 현감을 지냈으며 동계면 수정리 뒷산 노적봉 일대를 하사받아 흥덕 장씨 입촌의 실마리를 열었다.
이후 흥덕 장씨 후손들은 수정리 일대의 사패지에 선조의 묘를 조성하였으므로 후손들의 왕래가 빈번하고 또한 선영을 돌보기 위한 토지 경작과 봉분 관리를 위해 정착함에 따라 점차 마을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수정 선산에 최초로 입장된 이는 성종(成宗) 때 어란포 만호와 마도 만호를 지낸 장경원(張敬原)이다. 수정리에 가호가 형성된 때는 1572년(영조 48)이며 이는 장경세가 할아버지인 사성 장응량(張應梁)이 죽자 여묘하면서 지은 초옥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이 초옥에는 남원의 저명한 미능재 최상중과 계곡 김복흥, 귀남 양사형 등이 장경세를 찾아와 형제의 의를 맺고 학문하는 장소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1565년(명종 20) 승지를 지낸 장경세의 생부 장건(張健)이 죽고, 1568년(선조 1) 장경세의 할머니 권씨가 이어서 죽자 장경세는 10여 년간 수정리를 떠날 수 없는 형편이 되어 이 초옥에서 기거하면서 과업에 정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1597년(선조 30) 왜군이 남원부를 함락하여 온갖 노략질을 자행하였으나 수정리는 아무런 피해를 받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수정리는 흥덕 장씨의 삶의 터전이 되었다고 한다.
[현황]
2000년 순창 지역 흥덕 장씨는 121가구, 32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4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동계면 수정리 흥덕 장씨 집성촌은 후손의 증가와 가문의 숭조 정신이 드높아져 재실이 건립되고 종토를 경작하는 이가 늘어나면서 1945년 광복 이전에는 100여 가구까지 늘어났다. 그러나 산업 사회의 발달과 교육과 취업을 위해 이거하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2011년 현재 수정리를 포함한 동계면에 거주하는 가구는 52가구로 수정리 13가구, 동심리 11가구를 비롯하여 수장리 8가구, 현포리 7가구, 관전리 4가구, 이동리 4가구, 주월리 3가구, 서호리 1가구, 장동리 1가구가 있다. 이들은 모두 수정리에 뿌리를 둔 장경세의 후손들로 대부분 사성공파(司成公派)이고 나머지는 진사공파(進士公派)로 조사되었다. 동계면 수정리에 1960년 중건한 흥덕 장씨의 재실 전성재(展誠齋)가 있고, 풍악산 향로봉 아래에 흥덕 장씨 선영이 자리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