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8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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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宜寧南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성용 |
세거|집성지 | 의령 남씨 세거지 - 전라북도 순창군 풍산면 죽곡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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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시조 | 남군보(南君甫) |
입향시조 | 남기령(南起寧) |
[정의]
남군보를 시조로 하고 남기령을 입향조로 하는 전라북도 순창군 세거 성씨.
[개설]
의령 남씨(宜寧南氏)는 남군보(南君甫)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의령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순창 지역 의령 남씨 입향조는 남기령(南起寧)이다. 2000년 통계청의 인구 조사 자료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4만 6529가구, 15만 394명이 거주하고 있다.
[연원]
의령은 경상남도 중앙부의 낙동강 하류 서안에 위치한 지명이다. 남씨는 중국에서 귀화한 성씨로, 문헌에 57본이 전해지고 있으나 영양(英陽)·의령·고성(固城) 3본을 제외한 나머지 54본에 대해서는 고찰할 수 없다. 이들 3본은 모두 같은 시조에서 분파한 혈족으로 남민(南敏)을 시조로 하고 있다. 남민은 본래 중국 봉양부(鳳陽府) 여남(汝南)[지금의 하남성 여남현] 사람으로 당(唐)나라 때 이부 상서를 지낸 김충(金忠)이었다. 755년(천보 14)[경덕왕 14] 안렴사로 일본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풍랑을 만나 신라 유린(有隣)[현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축산리] 땅에 표착하였으나, 신라의 자연 풍경이 아름다워 눌러 살고 싶다고 청하자, 경덕왕(景德王)이 남쪽에서 왔다 하여 남씨로 사성하고 천성이 영민하다 하여 이름을 민(敏)으로 고쳐 줬다. 또한 영양을 식읍으로 하사하고 영의(英毅)라 시호하였다.
고려 때 이르러 남민의 7세손 남진용(南鎭勇)의 세 아들 남홍보(南洪輔), 남군보(南君甫), 남광보(南匡甫) 등이 나와 각각 중대광 도첨의 찬성사, 추밀원직 부사, 고성군(固城君) 등에 올라 영양 남씨(英陽南氏), 의령 남씨, 고성 남씨(固城南氏)의 분적 시조가 되어 각기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이 중에서 둘째 집인 의령 남씨는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움으로써 중앙 정계의 중추에 진출하여 상신(相臣) 6명과 대제학 6명을 배출하였다. 개국 공신 남재(南在), 남은(南誾) 형제 중 남재의 후대에서 많은 경상(卿相)과 석학이 나왔다. 남재의 손자 3형제 중 남지(南智)는 좌의정, 남간(南簡)은 예문관 직제학, 남휘(南暉)는 태종(太宗)의 부마가 되었다.
이밖에 중종(中宗) 때 영의정을 지낸 남곤(南袞), 세조(世祖) 때 장군 남이(南怡), 생육신의 한 사람인 남효온(南孝溫), 소북(小北)의 영수 남이공(南以恭), 소론(少論)의 영수 남구만(南九萬), 영조 때 양관 대제학을 지낸 남유용(南有容), 순조(純祖) 때 영의정을 역임한 남공철(南公轍), 철종(哲宗) 때 대제학을 지낸 남병철(南秉哲), 인조(仁祖) 때 우의정과 좌의정을 역임한 남이웅(南以雄), 정묘호란 때 평안도 병마절도사로서 안주성을 사수하다 순절한 남이흥(南以興)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남이공의 형 남이신(南以信)의 세 손자 중 효종(孝宗) 때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남선(南翧)의 자손이 번창하여 창명공파(滄溟公派)를 이루었다. 조선 시대에 문과 144명, 사마시 384명, 역과 1명, 의과 1명, 율과 1명 등 모두 531명의 과거 급제자가 나왔다.
[입향 경위]
사천백(沙川伯) 남을진(南乙珍)의 후예 증병조 참의 순은(淳隱) 남기령이 전라남도 담양에서 풍산면 죽곡리 상죽 마을에 들어와 정착한 이후 그 후손이 대를 이어 거주하고 있다.
[현황]
2000년 순창 지역 의령 남씨는 55가구, 14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1989년 순창군에서 실시한 인구 통계 자료에 따르면 당시 순창 지역 의령 남씨는 풍산면 죽곡리 상죽 마을에 23가구가 집성촌을 이루며 세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