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8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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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文化柳氏 |
이칭/별칭 | 문화 류씨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성용 |
세거|집성지 | 문화 유씨 세거지 - 전라북도 순창군 금과면 남계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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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시조 | 유차달(柳車達) |
입향시조 | 유동유(柳東游) |
[정의]
유차달을 시조로 하고 유동유를 입향조로 하는 전라북도 순창군 세거 성씨.
[개설]
문화 유씨(文化柳氏)는 유차달(柳車達)을 시조로 하고, 본관을 문화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순창 지역 문화 유씨 입향조는 무안 현감 석헌(石軒) 유옥(柳沃)의 후예인 호계(虎溪) 유동유(柳東游)이다. 2000년 통계청의 인구 조사 자료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8만 7186가구, 28만 4083명이 거주하고 있다.
[연원]
문화는 황해도 신천군 문화면 일대에 있던 옛 지명이다. 유차달은 고려 개국공신으로 후삼국 시대 유주(儒州)[현 황해도 신천군 문화면 묵방동]의 호족이었다. 유차달의 5대조인 유색(柳穡)이 신라 헌덕왕(憲德王) 때 유주의 구월산(九月山)으로 은거한 이래, 자손들이 그 지역에서 대를 이어 살다가 고려 개국 이후 개성에서 세거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후백제군을 정벌할 때 군량 보급에 어려움을 겪자, 유차달이 수레 1천량을 만들어 군량을 조달하였다고 한다. 그 공으로 대승(大丞)에 올라 삼한 공신에 봉하여졌다고 한다. 유차달의 원래 이름은 유해(柳海)였는데, 태조가 이차위달(以車爲達)[수레로 현달함]하였다고 하여 유차달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유차달의 7세손 문간공(文簡公) 유공권(柳公權)이 고려 명종(明宗) 때 정당문학과 참지정사 등을 지내고 문장과 글씨로 명성을 떨쳤으며, 그의 아들 유언침(柳彦琛)과 유택(柳澤)으로부터 크게 두 갈래로 갈라져 현재 문화 유씨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였고, 총 14개 파로 갈라졌다.
유차달의 9세손인 유경(柳璥)은 고려 고종(高宗) 때 최의(崔誼)의 무신 정권을 무너뜨림으로써 왕정을 회복하는 데 일조하였다. 그 공으로 위사 일등 공신에 봉하여졌으며 그의 고향인 유주를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자 후손들이 유주[문화의 옛 이름]를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조선 시대 때 134명이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음사(蔭仕)를 포함한 실직 당상관이 90여 명에 이르고, 그중 상신(相臣) 9명, 호당(湖堂) 5명, 청백리(淸白吏) 4명, 공신 11명 등을 배출하였다.
한편 유씨는 2000년 기준으로 남한에 60만여 명, 56개의 본관이 있는데, 이 중 문화 유씨가 28만여 명으로 대종을 이루고, 그다음으로 전주, 진주, 고흥, 강릉, 서산, 풍산 등이 1만 명이 넘는다. 예전에는 모든 유씨는 문화 유씨의 분파로 알려졌으나, 지금은 본관에 따라 경우가 다르다는 견해가 대두되고 있다. 또한 문화 유씨가 연안 차씨와 뿌리가 같다는 설은, 최근 보학계와 사학계의 연구를 통해 위서(僞書)인 『차원부설원기(車原頫雪冤記)』에 근거를 둔 잘못된 사실임이 밝혀졌다.
[입향 경위]
유동유는 순창 강천사(剛泉寺)의 삼인대(三印臺)에서 신비 복위(愼妃復位) 상소를 모의했던 순창 군수 김정(金淨), 담양 부사 박상(朴祥)과 함께 참여한 무안 현감 유옥의 후예이며, 뇌천(磊川) 유호(柳灝)의 아들이다. 유동유의 처가가 순창 호치(虎峙)의 순창 설씨(淳昌偰氏)이기에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에서 처가를 따라 17세기 중엽 금과면 남계리로 들어와 정착하였다. 한편 유동유의 형인 진사 어목(漁牧) 유동순(柳東洵)과 유동순의 형인 감역 남간(南澗) 유동연(柳東淵)의 자손은 지금의 전라북도 임실군 삼계면 강촌(江村)에서 명문으로 알려졌는데, 순창의 유씨는 강촌의 유씨와 함께 이름을 나란히 하는 명문이다.
[현황]
2000년 순창 지역 문화 유씨는 92가구, 21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1989년 순창군에서 실시한 인구 통계 자료에 따르면 당시 순창 지역의 문화 유씨는 금과면 남계리 남계 마을에 19가구가 집성촌을 이루며 세거하고 있다.
[관련 유적]
순창 삼인대는 강천사 맞은편에 있는 정면 1칸의 비각으로, 비각 안에는 높이 157㎝, 너비 80㎝, 두께 23㎝의 삼인대 비(碑)가 세워져 있다. 순창 군수 김정과 담양 부사 박상, 무안 현감 유옥 등이 결의하여, 1506년(연산군 12) 중종반정으로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난 단경 왕후 신씨를 다시 왕비로 모시자는 상소를 올렸다. 이들은 관직에서 쫓겨날 것과 죽음을 각오하고 관직을 표시하는 도장[직인]을 소나무 가지에 걸었다. 그 후 이곳에 비각을 세워 ‘삼인대’라 하였다.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청계리 산271번지에 위치하며 1973년 6월 23일 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되었다. 1994년 지역의 향토인과 후손들에 의해 삼인 문화 선양회가 구성되어 1995년부터 매년 음력 8월 그믐날에 삼인대에서 삼인 문화제를 개최하고 있다.
전라북도 순창군 금과면 남계리에 있는 호계정(虎溪亭)은 유동유가 1640년(인조 18)에 세운 정자이다. 정자에는 유동유의 형제인 유동순과 유동연이 지은 시, 순창 군수를 지낸 최온의 시가 현판으로 남아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선비들이 이곳에 모여 나라 잃은 설움을 시로써 달래기도 하였다고 한다. 호계정 옆 남쪽 대숲에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비각이 있다. 비각 안에는 비석 두 기가 있는데 하나는 효자 문화 유씨 유도찬의 기행비이고, 다른 하나는 열부 완산 최씨(完山崔氏)의 기행비이다. 광산 김문옥이 글을 짓고 상락 김정회가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