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8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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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曲阜孔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성용 |
세거|집성지 | 곡부 공씨 세거지 - 전라북도 순창군 금과면 방성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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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시조 | 공소(孔紹) |
입향시조 | 공동(孔童) |
[정의]
공소를 시조로 하고 공동을 입향조로 하는 전라북도 순창군 세거 성씨.
[개설]
곡부 공씨(曲阜孔氏)는 공소(孔紹)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곡부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순창 지역 곡부 공씨 입향조는 공자의 64세손 학재(學齋) 공동(孔童)이다. 2000년 통계청의 인구 조사 자료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2만 2758가구, 7만 3093명이 거주하고 있다.
[연원]
곡부는 중국 산둥성 제령도(濟寧道)에 위치한 고을 이름으로 일찍이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아우 주공(周公) 단(旦)이 봉해진 지역이다. 공씨의 본관은 곡부 단본이다. 시조는 공자(孔子)[B.C. 551~B.C. 479,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 중국 노(魯)나라 추읍(鄒邑) 사람]이며, 공자의 53세손인 공완(孔浣)의 아들 중 첫째 공사회(孔思晦)는 중국에서 세거하였고, 둘째 아들인 공소(孔紹)가 원(元)나라 순제(順帝) 때 한림학사를 지냈는데, 1351년(공민왕 즉위년) 노국 대장 공주(魯國大長公主)를 배종하여 고려에 들어와 귀화하였다. 이후 문하시랑평장사[내사문하성의 정2품]로 회원군(檜原君)[회원은 경상남도 창원의 옛 이름]에 봉하여지고 창원을 본관으로 하사 받음으로써 우리나라 공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 후 노나라의 공씨와 같은 조상이라고 하여 1794년(정조 18) 왕명에 의해 다시 곡부를 본관으로 하였다. 조선 시대에 문과 4명, 율과 11명 등 모두 15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입향 경위]
금과면 방성리에 처음 들어온 사람은 공자의 64세손 공동이다. 공동은 임진왜란 당시 전라남도 화순에서 방성리로 이거하여 그 자손이 세거하게 된 것이다. 방성리는 원래 방그미라 불렀던 곳이다. 조선 후기 순창 군수로 부임한 이성열이 방그미 마을을 찾아왔다가 공자의 후예가 사는 마을이니 방성리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방성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현황]
2000년 순창 지역의 곡부 공씨는 60가구, 13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1989년 순창군에서 실시한 인구 통계 자료에 따르면 당시 순창 지역의 곡부 공씨는 금과면 방성리 방성 마을에 39가구가 있었으며, 2010년 현재는 31가구가 조상의 터를 지키며 세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