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8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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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豊川盧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성용 |
세거|집성지 | 풍천 노씨 세거지 -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 운암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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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시조 | 노수(盧穗) |
입향시조 | 노광정(盧光鼎) |
[정의]
노수를 시조로 하고 노광정을 입향조로 하는 전라북도 순창군 세거 성씨.
[개설]
풍천 노씨(豊川盧氏)는 노수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풍천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순창 지역 풍천 노씨 입향조는 옥계(玉溪) 노진(盧稹)의 후손인 노광정(盧光鼎)이다. 2000년 통계청의 인구 조사 자료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1만 2183가구, 3만 9397명이 거주하고 있다.
[연원]
풍천은 황해도에 있었던 옛 지명이다. 노씨의 도시조(都始祖)는 중국 범양(范陽) 사람으로 당(唐)나라 때 한림학사를 지낸 노수라고 알려져 있다. 노수는 당나라 말년 선종(宣宗) 때에 아들 아홉 형제와 함께 우리나라에 들어왔으며, 아홉 형제가 모두 등과하여 고려 초년에 봉읍(封邑)됨으로써 광주(光州)·교하(交河)·풍천(豐川)·장연(長淵)·안동(安東)·안강(安康)·연일(延日)·평양(平壤)·곡산(谷山) 등 아홉 개 본관으로 나누어졌다. 일반적으로 광주 노씨가 큰집으로 알려져 있으나 교하 노씨·풍천 노씨 또한 가승(家乘)에는 각기 큰집으로 나와 있다.
풍천 노씨는 노수의 아홉 형제 중 셋째 아들인 노지(盧址)가 고려 시대 풍천백(豊川伯)에 봉하여졌다. 그러나 이후 계대가 실전되어 후손 중 고려 시대에 국자 진사(國子進士)를 역임한 노유(盧裕)가 풍천에 세거하였기 때문에 후손들이 노지를 득관조(得貫祖)로, 노유를 1세조(一世祖)로 하고 풍천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 왔다.
순창 지역에 입향한 풍천 노씨는 노진의 후손들이다. 노진은 1546년(명종 1) 문과에 급제, 1555년(명종 10) 지례 현감으로 치적이 많아 청백리로 뽑혔다. 1571년(선조 4) 부제학에 이르러 늙은 어머니의 봉양을 위하여 곤양 군수[곤양은 경상남도 사천 지역의 옛 지명]로 나아갔다가 대사간이 되고, 1575년(선조 8) 예조 판서에 올랐다. 평소에 기대승(奇大升)·노수신(盧守愼)·김인후(金麟厚) 등의 학자들과 도의(道義)로 교유하였다. 효로써 정려가 세워졌고, 남원의 창주 서원(滄州書院), 함양의 당주 서원(溏州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에 『옥계 문집』이 있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입향 경위]
노광정이 조선 후기 전라북도 남원에서 쌍치면 운암리 아천 마을로 들어와 정착하였다. 아천 마을의 유래를 살펴보면, 삼국 시대 때 백제가 패망하자 아찬(阿飡) 벼슬을 한 사람이 이곳에 터를 잡고 마을을 이루게 되었는데, 그 벼슬 이름을 따서 아찬이라 부르다가 아천이 된 것이라고 한다. 아천 마을이 가장 융성하였던 때는 조선 후기 풍천 노씨가 남원에서 아천으로 이주하여 정착하면서부터라고 한다. 풍천 노씨의 후손이 번창하고 일가 대소가가 천석꾼, 만석꾼의 대부호를 이루어 집터만도 수천 평을 헤아리고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수십 채였으며 중국 명사들과도 교류하였다고 한다.
[현황]
2000년 순창 지역 풍천 노씨는 42가구, 10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1989년 순창군에서 실시한 인구 조사에서 아천 마을에 살고 있는 풍천 노씨는 단 3가구뿐, 지난날의 융성했던 자취는 찾아볼 수 없다. 순창의 풍천 노씨들은 부족(副族)으로 알려졌으며, 인물 또한 많이 배출하였다. 노병준(盧秉俊), 노병권(盧秉權)과 제헌 국회 의원이던 노일환(盧鎰煥), 그리고 노장환(盧章煥) 등 개화기를 전후하여 십여 명의 걸출한 인물이 국내외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8·15 광복 후의 혼란한 때에 좌익·우익 대립으로 많은 희생자를 냈으며, 아천 마을 풍천 노씨들이 소장했던 문화유산, 수만 권의 고서, 수십 채의 흥왕했던 집들은 6·25 전쟁 당시 모두 소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