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13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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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魚巖書院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형성 |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 둔전리에 있던 조선 후기 학자 김인후, 이이, 정철, 김시서를 모셨던 서원.
[개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1510~1560]는 1545년(인종 1)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처자가 있는 순창으로 내려왔다. 1548년(명종 3) 순창군 쌍치면 점암촌(鮎巖村)에 우거하며 초당을 지어 훈몽재(訓蒙齋)라 이름하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고암(鼓巖) 양자징(梁子澂)[1523~1594], 월계(月溪) 조희문(趙希文)[1527~1578] 등과 함께 점암촌 남쪽 1㎞ 정도 떨어진 물가 위 바위에서 『대학(大學)』을 강하였는데, 이후 바위 이름을 대학암(大學岩)이라 불렀다. 훈몽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는데, 김인후의 5대손 자연당(自然堂) 김시서(金時瑞)[1652~1707]가 순창으로 이거하여 1680년경 훈몽재 터에 자연당(自然堂)이란 이름으로 복원하여 후학을 양성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후 점차 퇴락하였으나, 순창의 유림과 후손들이 다시 점암촌에 훈몽재를 복원하였다.
[변천]
1827년(순조 27) 순창 유림의 공의(公議)로 김인후,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 정철, 김시서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김인후가 강학하던 훈몽재 옆에 어암 서원(魚巖書院)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어암서원이란 명칭은 점암(鮎巖)의 점(鮎)에서 ‘점(占)’을 빼고 지은 것으로 보인다. 마을 앞 바위가 있는 소(沼)에서 물고기를 잡았다고 하여 어암사(漁巖祠)로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
창건된 이후 어암서원은 선현을 향사하며 유교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으나, 1876년(고종 13) 대원군의 서원 철폐로 훼철되었다. 이에 김인후와 이이의 위패는 순창 향교, 정철의 위패는 창평(昌平) 동강서원(東江書院), 김시서의 위패는 어암서원 터에 매안(埋安)하였다. 1951년 6·25 전쟁 때 훈몽재마저 불타 버렸는데, 2009년 김인후의 학문과 정신을 되살리고자 김인후가 『대학』을 강마하던 대학암 근처에 훈몽재를 비롯한 자연당, 양정관(養正館), 삼연정(三然亭) 등을 중건하였다. 그러나 서원은 복원하지 못하고, 둔전 마을에 어암서원 유허비(魚巖書院遺墟碑)를 세웠다.
[형태]
서원이 현존하지 않아 형태를 알 수 없다. 1876년 훼철되기 전 건물로는 사우(祠宇)·내신문(內神門)·훈몽재·동재(東齋)·서재(西齋)·전사청(典祀廳)·고사(雇舍)·대문(大門) 등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