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8003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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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漢柱紀績碑 |
영어의미역 | Monument for Choe Hanju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연지리 797-6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최인표 |
성격 | 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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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시기/일시 | 1971년 11월 28일 |
관련인물 | 최한주 |
재질 | 화강암 |
높이 | 201㎝ |
너비 | 54㎝ |
소재지 주소 |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연지리 797-6 |
소유자 | 강릉최씨 문중 |
[정의]
1971년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연지리에 최한주의 행적을 기록하여 세운 비.
[개설]
1283년(충열왕 9) 원(元)나라 세조(世祖)가 일본을 정벌할 때 명주군(溟州君) 최한주(崔漢柱)가 종군(從軍)하게 되었다. 동해에서 회오리바람을 타고 있던 배의 닻이 바위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자 최한주가 물속에 들어가 닻을 빼내 배가 움직이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최한주가 물 위로 올라와 보니 배는 이미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최한주는 떠다니는 널빤지에 의지하여 살아났다고 하며, 혹은 자라의 등을 타고서 육지로 나왔다고도 한다. 이에 울진 지역 주민들이 최한주의 행적을 기록하여 비석을 세웠다고 전한다.
[건립경위]
고려시대 건립된 최한주에 대한 비는 소재와 흔적을 알 수 없었는데, 『율곡전서(栗谷全書)』에서 최한주의 신도비에 관한 자료를 얻어 1970년 울진군 해안 일대를 조사하였으나 찾지를 못하였다. 이에 임진왜란 때 왜구들이 비석을 파괴한 것으로 추정하고, 고비(古碑) 재건립 추진위원장인 최익성(崔益晟)과 유림이 협의하여 최한주 기적비를 세우기로 하고, 1971년 11월 28일 울진군수 김일규(金一圭)가 비문을 지은 비석을 연호정 뒤에 건립하였다.
[위치]
최한주 기적비는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연지리 797-6번지 연호정 북쪽 소나무 숲에 있다. 북쪽에는 울진고등학교가 바로 인접하여 있으며, 서남쪽으로 울진군 청소년수련관과 울진군 체육관, 울진중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동쪽으로 300m 정도 떨어진 곳에는 국도 7호선이 지나고 있으며, 연호교차로를 통하여 국도 7호선을 이용할 수 있다.
[형태]
최한주 기적비 주변에는 화강암으로 난간을 둘렀으며, 2층으로 된 화강암 단 위에 귀부를 두고 그 위에 비석을 고정하였다. 최한주 기적비는 화강암으로 제작되었으며, 귀부, 비신, 이수로 구성되어 있다. 비석의 규모는 용 무늬를 새긴 이수가 가로 73㎝, 세로 45㎝, 높이 55㎝이며, 비신은 높이 146㎝, 너비 54㎝, 두께 23.5㎝이다. 귀부는 거북의 형태로 높이 140㎝, 길이 160㎝이다.
[금석문]
비신의 전면에는 “명주군강릉최공한주기적비(溟州君江陵崔公漢柱紀蹟碑)”라 새겼는데 글자 크기는 가로 10㎝, 세로 10㎝이다. 후면과 측면에는 최한주의 행적과 비석의 유래와 건립에 관계한 사람들의 이름과 건립 연대를 새겼는데 글자의 크기는 가로 3㎝, 세로 3㎝이다. 비문을 지은이는 울진군수 김일규이고, 최한주의 20세 후손 최돈긍(崔燉恆)이 글씨를 썼다. 원문에서는 옛 비석에 나타난 최한주의 행적을 찾아서 기록하였고, 최한주의 가계와 『율곡전서(栗谷全書)』를 인용하여 최한주의 행적을 더욱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현황]
최한주 기적비는 강릉최씨 문중에서 관리하여 잘 정비된 모습이며,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연지리에 있는 연호정과 더불어 공원 내에 자리하여 산책객들의 발길이 잦아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강릉최씨 문중뿐만 아니라 울진군 내의 유림이 참여하여 최한주 기적비를 건립하였다. 최한주 기적비를 통하여 충용의 본보기를 재현하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