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5013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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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最東端-獨島- |
영어의미역 | The Eastern Extremity of Korea, Dokdo |
분야 | 지리/자연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황정환 |
[개설]
독도는 동도(東島)와 서도(西島) 및 그 주변에 흩어져 있는 89개의 바위섬으로 이루어진 화산섬이다. 예전에는 삼봉도(三峰島)·가지도(可支島)·우산도(于山島) 등으로도 불렸는데, 울릉도 개척 당시 입도한 주민들이 돌섬으로 부르다가 이후 돍섬으로 변하였고, 다시 독섬으로 변하였다. 독섬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 독도(獨島)이다. 프랑스와 유럽 같은 나라에서는 독도를 발견한 배의 이름을 따서 리앙쿠르(Liancourt)나 호넷(Hornet)으로 표기한다. 독도의 면적은 187,554㎡로, 울릉도에서 남동쪽으로 87.4㎞ 떨어진 해상에 있다.
[독도의 자연 환경]
동도의 전체 면적은 73,297㎡, 최고 높이 98.6m의 섬으로, 서도보다는 작지만 꼭대기에 비교적 평탄한 부분이 있어 등대와 경비초소 등의 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여기에 비해 서도의 면적은 88,740㎡로 동도보다는 넓으나 최고 높이 168.5m로, 산정이 뾰족하고 사면의 경사가 급하여 장비가 없으면 오를 수 없다.
독도는 수심 2,000m가 넘는 동해 해중에서 분출한 화산성해산(火山性海山)이다. 울릉도와 함께 산정이 해면상에 노출되어 있지만, 산정이 해면하에 있는 해산도인 울릉도의 동방 38㎞ 지점에 1개, 독도 동남방 45~50㎞ 지점에 각 1개씩 있다. 이들 5개의 해산이 동서로 일련의 해산열(海山列)을 형성하고 대마해분(對馬海盆)의 북쪽 경계를 이루고 있다. 월평균기온은 연중 영상이고, 강수량이 일 년 내 고루 분포하지만, 바닷바람이 심하여 본토와 비교할 때 해양성 기후의 특색을 더 많이 나타내고 있다.
[독도의 어업 환경]
삼국시대에 존재한 우산국으로 미루어 울릉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상당히 오래된 일로 추측된다. 공도정책(空島政策)과 척민정책(拓民政策) 등에서도 알 수 있듯 울릉도는 예부터 사람이 살 만한 땅으로 인식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독도의 경우 험난한 바위와 인간의 접근을 거부하는 가파른 지형에서도 알 수 있듯 대형 식물이 살아가기에는 부적절한 환경 조건을 구비하고 있다.
당연히 인간이 살기에도 부적합한 환경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서, 현재도 독도에서는 인간 생활에 필수적인 식량과 식수는 물론 취사·냉난방·발전을 위한 연료를 외부에서 공급받고 있다. 이렇듯 울릉도가 사람이 살 만한 땅이라면, 완전한 자급이라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독도는 사람이 거주하기에는 부적절한 섬이 틀림없으나, 오랜 옛날부터 어민과의 관계는 꾸준하게 지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바로 독도 근해의 황금어장 때문이다.
독도 근해에는 북쪽으로 대화퇴(大和堆)라는 얕은 바다가 있고, 대마난류와 북한한류가 교차하는 해역으로 조목이 발달해 있다. 이곳은 플랑크톤이 풍부하여 회유성 어족이 풍부하기 때문에 울릉도와 동해안의 어민들에게 주요한 어장이 되고 있다. 주요 어종으로서는 오징어와 명태·대구·상어·볼락·고래·연어·송어 등이 있으며, 연간 출어하는 어선의 수는 천여 척에 이르고, 어획고는 약 2만 톤에 이른다.
또한 독도 주변의 파식대지와 암초에는 미역과 다시마 등의 해초류와 전복·소라 등 패류가 엄청나게 서식하고 있어 이를 채취하기 위하여 많은 어선들이 모여든다. 독도 주민과 울릉도 주민들은 해초 채취 허가를 얻어 서도의 해안에서 해초와 패류를 채취해 오고 있는데, 최근에는 전복과 소라를 부화하여 양식을 하기도 한다.
[역사에 나타난 독도]
울릉도에 있던 우산국(于山國)이 신라에 귀복(歸服)한 것은 하슬라주(何瑟羅州) 군주(軍主) 이찬(伊飡) 이사부(異斯夫)의 정벌이 있은 6세기 초인 512년(지증왕 13)부터였다. 그뒤 우산국은 신라에 이어 고려에 매년 토산물을 바쳐 오다 11세기 초엽 동북 여진족의 침략을 받으면서 급격히 쇠퇴하여 갔으며, 12세기 중엽부터 동계 울진현(東界蔚珍縣) 관할로 편입되었다.
조선시대로 들어오면서 울릉도는 지속적인 공도정책이 유지되었으나 문헌상에는 자주 울릉도와 독도가 언급되었다. 1417년(태종 17) 울릉도와 그 주위를 조사하기 위해 삼척만호 김인우(金麟雨)를 무릉등처안무사(武陵等處按撫使)에 임명하여 파견했으며, 이후 세종은 김인우를 다시 파견할 때 ‘우산·무릉등처안무사(于山·武陵等處按撫使)’로 임명하여 우산도와 무릉도 두 섬을 모두 순견(巡見)하는 임무를 맡겼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서는 “우산도[독도]와 무릉도[울릉도]의 두 섬이 울진현 정동의 바다 가운데 있으며, 서로 거리가 멀지 않아 날씨가 청명하면 가히 바라볼 수 있는데, 신라시대에는 우산국이라 칭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후 독도는 성종 때 일부에서 삼봉도(三峰島)로, 정조 때는 가지도(可支島)로 불렀으나 조선 정부의 공식문서와 기록에는 ‘우산도(于山島)·우산도(芋山島)’로 기록되어 19세기 말까지 내려왔다. 독도의 명칭이 우산도였다는 사실은 이 섬의 명칭이 일찍이 우산국에서 유래했음을 보여주며, 독도가 우산국의 영토였음을, 다시 말해 우리의 영토임을 증명해 주는 근거이기도 하다.
[이야기로 보는 독도]
독도의용수비대장 홍순칠의 수기 『이 땅이 뉘 땅인데』에는 근대 신종교의 하나인 보천교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쓰여 있다. “저녁이 되면 50세 가량의 남녀 10여 명이 모여 훔치, 훔치 태을 천상…… 큰 소리를 외치고 뛰어 나면 여신도들은 노래를 한 가닥 뽑는데 그 가사 가운데 ‘간산도를 찾아가세 불로장생하리다’라고 했다. 이에 간산도가 어디인지 할아버지에게 그 위치를 물어 본 결과 간산도는 우(于)자를 간(干)자로 잘못 읽어 우산도가 간산도로 된 것이라고 했다. 우산도는 지금의 독도를 지칭하는 말로 그들의 간산도는 독도라는 이야기가 된다.”
보천교는 증산교 계열의 신종교로서, 증산교 창시자 강일순(姜一淳)의 사망 후인 1911년에 차경석이 세웠다. 교세의 중심지는 동학농민운동의 본거지인 전라도 일대였다. 보천교는 울릉도 개척령 당시 불교와 천주교, 개신교와 함께 울릉도에 입도한 종교 중 하나이지만, 현재 활동이 중단되어 울릉 지역에서는 신도나 예배 장소를 찾아볼 수 없다. 『이 땅이 뉘 땅인데』에 따르면, 보천교인들은 간산도를 찾아서 울릉도로 들어왔으며, 그들이 찾는 간산도가 독도임을 알고 무리하게 독도로 건너가다 조난을 당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보천교인들이 간산도라고 불렀다는 독도의 특징적인 자연경관이 그대로 드러나는 이야기가 「가산도의 신비」라는 전설이다. 「가산도의 신비」는 울릉 지역에서 독도와 관련하여 전해 오는 대표적인 이야기로, 풍랑을 만나 우연히 가산도라는 섬으로 들어간 세 명의 어부가, 그곳에 살고 있던 웬 노인의 도움으로 다시 울릉도로 돌아온다는 이야기이다.
살아서 돌아온 어부들의 말을 듣고 마을 사람들이 큰 배에다 식량과 물을 싣고 신선이 살고 있다는 신비의 섬을 찾아나선다. 그러나 철이 아닌 복숭아꽃이 떠내려오는 것을 보았을 뿐 풍랑이 심하여 끝내 이 섬을 찾지 못하고 되돌아온다는 결말에서도 보이듯 옛 사람들에게 가산도, 곧 독도는 인간이 사는 섬이 아닌 신선이 사는 섬으로 표현되어 있다. 인간이 살기에 적합한 울릉도와는 대조적인 지리적 환경과 기상 조건 및 지형적 조건 등 옛 사람들이 품었을 만한 독도의 신비감을 잘 대변하고 있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