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06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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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碑 |
이칭/별칭 | 장군정,장군천,장독천,장독걸샘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동무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문혜지 |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518년 - 양달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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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555년 - 양달사 사망 |
현 소재지 | 장독걸샘 비 -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동무리 |
성격 | 기념비 |
관련 인물 | 양달사 |
크기(높이,너비,두께) | 80㎝[비신 높이]|59㎝[비신 너비]|34㎝[비신 두께] |
[정의]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동무리에 있는 장독걸샘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
[건립 경위]
1555년(명종 10) 5월에 남해 현감으로 재임하던 양달사(梁達泗)[1518~1555]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관직을 버리고 시묘를 위해 고향 영암에 돌아왔다.
이 무렵 왜구들이 1552년과 1553년 두 해에 걸쳐 제주를 노략질하고 1555년 5월에는 60여 척의 병선을 이끌고 달량진[현 해남군 달량포]에 들어와 을묘왜란(乙卯倭亂)을 일으켰다. 당시 영암 군수 이덕견은 싸움다운 싸움도 해보지 않고 항복해 버려 며칠 사이에 영암군 관아가 그들의 발길에 짓밟히게 되었다.
영암읍에서 9㎞ 거리에 있는 봉호정(鳳湖亭)에 귀향해 있던 양달사는 이 비보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상중(喪中)의 몸이라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종제(宗弟)인 양응정(梁應鼎)에게 사람을 보내 “이 일을 어쩌면 좋겠느냐”고 상의하였다. 양응정은 충효일체(忠孝一體)인데 상중임을 따지겠느냐는 답신을 보내왔다.
편지를 받아 본 양달사는 곧바로 형 양달수(梁達洙), 동생 양달해(梁達海) 및 양달초(梁達礎)와 더불어 의병을 모집하여 영암읍으로 향하였다. 이미 왜구가 읍내 주변으로 들어와 있었으므로 이들과 3일간이나 격전을 벌였다.
한편 당시 관군은 완산 부윤(完山府尹)으로 있던 이윤경(李潤慶)[1498~1562]이 인솔했는데 전쟁터에는 물이 없었다. 잇단 3일간의 격전 끝에 적에게 포위되어 군량미가 떨어지고 마실 물이 고갈되자 군사들은 큰 혼란과 굶주림과 갈증을 겪게 되었다.
이에 군사들의 동태를 살피던 양달사가 군령 기를 높이 들고 한번 호령한 뒤 땅을 내리찧자 신기하게도 “쾅.” 소리와 함께 군령 기를 찍었던 자리에서 물줄기가 솟아올랐다. 너무나 뜻밖의 광경을 바라보던 군사들은 함성을 올리며 솟아오르는 물로 갈증을 달래고 사기가 충천하여 수많은 왜적을 섬멸하였다.
이와 같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어서 이 샘을 ‘장독걸샘’이라 부르게 되었다. 장독걸샘은 바위틈에서 새어 나오는 석수(石水)로 가뭄이 극심해도 물이 마르지 않았다고 하며, 상수도가 없을 때는 인근 마을 300여 호의 식수로도 이용되었다.
장독걸샘 비는 이러한 일화를 가진 장독걸샘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위치]
장독걸샘 비는 영암군 영암읍 동무리의 영암군청 근처 새마을 금고 위쪽의 양달사 비(梁達泗 碑)와 나란히 서 있다.
[형태]
비석의 규모는 높이 80㎝, 너비 59㎝, 두께 34㎝이다.
[현황]
비석의 마모가 심하지 않고 관리가 비교적 잘 되어 있다. 장독걸샘 비는 장독걸샘 터 옆에 서 있으며, 샘터는 2013년 현재 매립되어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고 원형은 아니지만 샘의 모형이 보존되어 있다. 또한 장독걸샘은 ‘장군정, 장군천, 장독천, 장독골샘’로도 불린다.
[의의와 평가]
장독걸샘 비는 조선 중기 영암 출신의 무신이자 의병장이었던 양달사가 을묘왜란에서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왜적에 굴복하지 않고 아군을 독려하며 결국에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 업적을 잊지 않고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