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4011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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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干拓事業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영암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변남주 |
[정의]
전라남도 영암군에서 강이나 바다, 호수의 일부를 둑으로 막아 육지로 만드는 사업.
[개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특히 서해안과 남해안은 리아스식 해안에 밀물과 썰물이 드나드는 개펄이 발달하여 간척에 유리하다.
고대의 간척은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에 있는 벽골제(碧骨堤)나 전라북도 익산시에 있는 황등제(黃登堤) 등에서 삼국 시대 간척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고, 고려 시대에는 몽고의 침입으로 말미암은 강화도 피란 시절에 군량미를 조달하려는 목적으로 강화의 제포·와포·이포·초포 등에서 간척한 사례가 기록으로 전한다. 조선 시대에 들어서도 국력의 강화와 재정 확보를 위하여 간척을 추진하였는데, 특히 인조에서 정조에 이르는 160여 년간은 간척 사업의 부흥기였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자신의 저서 『목민심서』에서 간척의 방법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나라 차원에서 시행하기도 하였지만, 간척한 사람에게 경작권이나 소유권을 주면서 장려하자 재지사족(在地士族)[지역에서 토지를 기반으로 권세를 누리던 토착 양반들]에 의한 간척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런데 조선 시대의 간척은 순전히 사람의 힘으로만 이루어졌기 때문에 작은 갯고랑이나 해변을 막는 정도이고, 방조제의 길이도 수백 미터를 넘지 않았다. 본격적인 간척은 일제 강점기 이후에 진행되었는데, 주로 일본 정부의 비호를 받으며 국가와 일본인 자본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먼저 간척을 합법적으로 진행하고자 간척과 관련된 법규들을 제정하였는데, 예컨대 1911년의 국유 미간지 이용법(國有未墾地利用法) 시행 규칙, 1921년의 공유 수면 매립령(公有水面埋立令) 등이 그것이다. 이때 간척은 주로 군량미 조달 등을 목적으로 삼았다. 간척의 규모는 큰 갯고랑을 막는 정도로 커졌고, 간척 사업과 관련하여 주민의 이주를 장려하여 간척지 마을이 새로 생기기도 하였다.
[전라남도의 간척]
일제 강점기에 영산강 유역에서는 영산포 주변, 전라남도 무안군의 장항포와 영화 농장(榮和農場), 영암군의 영암만과 서창 등에서 간척이 이루어졌다. 간척 농지 주변에는 일본인 자본에 의하여 정미소도 운영되었다. 영암의 해창·서창·석포를 비롯한 전라남도 나주의 영산포와 신설포 등, 바닷길을 통해 쌀을 목포로 운송하는 데에 필요한 포구도 발달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전국적으로 178곳에 약 396㎢ 정도가 간척되었는데, 이 중에서 전라남도에서는 해남군에서 약 34㎢, 신안군에서 34.5㎢가 간척되었다.
해방 후에도 미국의 원조를 받거나 외국 자본을 빌려와 간척은 계속되었다. 여전히 인력으로 하였기 때문에 간척 규모는 영세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에는 중장비가 등장하면서 대규모 간척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제방 길이도 수천 미터에 이르고 거대한 물목을 틀어막는 공사로 발전하였다. 예컨대, 1980년 영산강 하굿둑 제방을 막자 74㎢의 갯벌이 간척되었으며, 해남군과 영암군에서는 1988년에 고천암, 1992년 영암호, 1994년 금호호 제방을 막아 250㎢의 대규모 간척지가 새로 생겼다.
지금까지 살펴본 전라남도 서남해안에 있는 주요 군들의 전체 간척 면적은 신안군 175.5㎢[전체 군 면적 중 23.3%], 진도군 122㎢[전체 군 면적 중 28%], 해남군 284㎢[전체 군 면적 중 27%]인데, 이는 해당 군들의 전체 면적 중 약 1/4에 해당한다.
[영암군의 간척]
전라남도 영암군의 간척을 보면, 조선 후기에는 영암만 일대, 특히 지금의 도포면 원항리에 있는 원목 제방, 도포면에 있는 도포와 우도 사이, 군서면에 있는 동평과 양장 사이 등에서 소규모로 이루어졌다. 삼포만 일대의 경우, 13세기에 바다였던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潘南) 서쪽은 조선 전기에 이미 간척된 것으로 보이며 영암군에서는 조선 후기에 지금의 시종면 와우리와 덕진면 영등리 장등 간을 잇는 간척 공사가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서 1910년대에 해창[조세를 수집·보관하던 창고]과 도포리 우도를 잇는 간척 제방 공사가 추진되는 등 간척이 본격화되어 동양 척식 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의 동척 농장(東拓農場) 등이 조성되었다. 학파 농장(鶴坡農場)은 현준호(玄俊鎬)[1889~1950]가 갯고랑이었던 학산천을 막아 만든 농장으로, 1939년부터 1949년 사이 간척 제방 물막이 공사로 만들어졌다.
해방 이후에 진행된 숭의 농장(崇義農場) 간척 공사는 1964년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영암군 도포면 도포리에서 개섬, 장구섬을 거쳐 월도에 이르는 6.4㎞를 연결하고자 하였으나, 재정난으로 공사가 지연되고 제방이 터지는 등 불완전한 준공이 이루어졌다가 결국 영산강 하굿둑이 1981년 준공되면서 완공되었다.
근대의 간척 사업이 군량미 확보와 미곡 증산 중심이었다면, 최근에 들어서는 생태 환경의 복원, 관광 등 다목적의 용도로 쓰임새가 변화하는 추세이다. 그런데 간척지는 어업권, 경작권, 소유권을 둘러싸고 갈등이 자주 발생하고, 특히 해양 생태계의 경제적 가치를 고려하는 연구가 차츰 활기를 띠면서 개펄 같은 생태 환경을 보존하는 추세라 새로운 대규모 간척 사업은 사실상 중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