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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동리 백자 가마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401338
한자 春洞里白瓷窯址
이칭/별칭 사기 점골,점등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전라남도 영암군 미암면 춘동리 미중 마을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한성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현 소재지 춘동리 백자 가마터 - 전라남도 영암군 미암면 춘동리 미중 마을지도보기
성격 백자 가마터

[정의]

전라남도 영암군 미암면 춘동리 미중 마을에 있는 조선 시대 백자 가마터.

[개설]

백자는 고려 시대에도 만들어졌지만 청자가 중심이던 당시에는 성행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조선에 들어와 세종 대[1418~1449]에 왕실에서 사용할 만큼 발전하였고 중국 왕실에서 요구할 정도로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세조 대[1455~1468]에는 이전에 비해 널리 확산되었는데 금령(禁令)을 내려 왕실 이외에는 사용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규제에도 불구하고 백자에 대한 요구는 대단히 높아 일반 사대부에게는 1616년(광해군 8) 이전부터 확대되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이후에는 전국적으로 기술이 확산되어 널리 사용되었다.

[위치]

춘동리 백자 가마터영암군 미암면 춘동리 미중 마을에 있다. 미중 마을 오른쪽에 있는 교회 앞 김현채 소유의 야산과 밭에 위치한다. 마을에서는 ‘사기 점골’ 또는 ‘점등’로 부르고 있다.

[발굴 조사 경위와 결과]

발굴 조사는 실시되지 않았으며, 『영암군의 문화 유적』과 『영암군지』, 『문화 유적 분포 지도』 등의 문헌에 간략하게 정리되어 있다.

[현황]

춘동리 백자 가마터는 경지 정리로 대부분 훼손되었으며 가마터 주변에 소량의 백자 조각이 흩어져 있다. 유적이 훼손되었으며 유물도 소량 출토되고 있어 정확한 성격을 파악할 수 없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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