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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평생 이상을 덕양에서 살아온 허광엽 할머니의 인생여정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E020302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 덕양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정현

덕양곱창 식당이 몰려 있는 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 덕양리 덕양시장 터 2층 슬라브 건물의 아래층에는 덕양2구 경로당이 있다. 이 경로당에는 70~90세 되는 할머니들이 매일 모여서 소일하고 있었다. 먼 객지에서 와서 덕양에서 오랫동안 사신 할머니를 찾으니 금년(2008년) 90세 되는 두 할머니를 가리켰다.

한 할머니는 화양면 출신 90세 진종심 할머니와 동갑인 해주 출신 허광엽 할머니였다. 진종심 할머니는 남편과 함께 젊은 시절 일본에서 살다가 귀국해서 남편과 함께 덕양에서 방앗간을 운영했다. 그러나 이 할머니는 살아온 과거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옆에 있던 한 할머니가 현재 어렵게 사는 할머니라고 귀띔해 주었다.

옆에 있는 할머니에게 고향을 물어 보았더니 이북 해주에서 월남했다고 한다. 나이가 90세임에도 매우 건강해 보였고 발음도 정확했으며 이야기하는 동안 자세도 흐트러짐이 하나도 없었다. 평소 이 할머니는 평소 경로당에서 이북 고향 이야기를 잘 들려주지 않았던 터라 해주할머니 이야기에 모든 할머니들이 솔깃하면서 경로당 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할머니는 15세 때 황해도 해주시에서 좀 떨어진 황해도 해주군 송림면으로 시집을 갔다. 남편은 10여 마지기 논이 있는 중농이었다. 북한의 농촌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어서 여자들은 가사에만 전념하고 농사일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시집가서 남편이 혼자서 농사일을 도맡아서 했기 때문에 농사일로 고생한 적은 없다고 한다. 그런데 덕양에 와 보니 여자들이 논에 나가서 모내기도 하고 추수도 하는 것을 보고 의아해 했다고 한다.

해방 후 한반도가 38선을 경계로 분단되었는데, 해주시는 북한에 속했으나 할머니가 사는 곳은 해주군 송림면은 남한에 속했다. 한국전쟁이 나자 공산당이 마을에 들어와 수확물에 대해 너무 간섭이 심해서 남편을 따라 가족과 함께 황해도 연백군 용매도로 피난 가서 몇 달 살았다. 1·4후퇴 때 아들과 딸을 데리고 연백군 피난민들과 함께 큰 배를 타고 월남했는데 내려 준 곳이 여수 선착장이었다. 지금의 여수엑스포역 부근에 있는 신항 부두이다.

여수 선착장에 임시 마련된 천막에서 하루를 자고 다음날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다. 할머니 가족은 연백군 피난민들과 함께 소라면으로 오게 되었다. 그때 할머니 나이 35세였다. 덕양에 들어온 지가 벌써 55년이 흐른 셈이다. 월남할 때 가지고 온 것이라고는 옷가지와 솥밖에 없어서 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다행히 정부에서 주는 수수·밀보리·안남미로 겨우 연명했고 굴 까는 일 등 허드렛일을 해서 번 돈으로 겨우 살림을 꾸려 나갔다. 그러면 어떻게 살았냐는 질문에 이승만 박사가 배급 주어서 살았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월남하기 전에는 중농이었는데 공산당의 핍박을 받아 월남한 것으로 짐작되었다.

할머니 나이 39세에 남편이 돌아가게 되자 농사일도 해보지 않은데다 재산도 없어서 앞이 캄캄했다. 보고 배운 것이라고는 고향 해주에서 만들어 먹었던 두부와 묵뿐이었다. 해주할머니는 생계를 위해서 두부와 묵을 만들어 덕양장에 내다 팔았다. 직접 만든 두부와 묵이라 잘 팔렸는데 특히 녹두로 만든 묵은 매우 인기가 좋았다.

할머니는 녹두묵을 만드는 방법을 설명하여 주었다.

녹두를 물에 담가 놓고 하룻밤 동안 불려 놓으면 껍질이 쉽게 벗겨지는데, 그 다음에 맷돌에 갈아서 천으로 걸러 놓으면 밑에 앙금이 가라앉는다. 솥에 물을 먼저 붓고 끓이다가 앙금을 잘 풀어서 풀 쑤는 것처럼 주걱으로 저으면서 한참 끓이면 죽처럼 농도가 높아진다. 그 다음엔 용기에 부어 식히면 묵이 된다.

할머니 고향 해주에서는 묵을 만들어 먹는 집들이 많은데 이곳 덕양 사람들은 별로 묵을 만들어 먹지 않는다고 한다. 이 후 식품 제조 허가제가 도입되면서 할머니는 직접 만들어 파는 것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 이후로는 공장에서 만든 묵과 두부를 받아서 장터에서 내다 팔았다.

덕양과 고향 해주는 무엇이 다르냐는 질문에서는 해주에서는 밭작물 작황이 매우 좋아서 배추도 크고 무도 큰데 덕양에 와보니 배추와 무가 흔하지도 않고 농작물의 작황이 좋지 않다고 한다. 김치는 멸치젓을 넣어서 그런지 너무 짜서 맛이 없는데, 해주김치는 새우·밴댕이젓·조기를 넣기 때문에 김치 맛이 좋았다고 하면서, 지금은 이곳에도 김치를 고급스럽게 담다 보니 맛이 똑같다고 한다. 해주할머니도 모든 면에서 덕양할머니가 된 것 같았다.

이북 고향에 가고 싶냐는 질문에 가고 싶지 않다고 잘라 말한다. 이유를 물으니 북한에 남아 있었던 친정 가족들은 1·4후퇴 때 연평도로 월남했다가 인천과 서울에 정착하였는데 이산가족 찾기를 할 때 연락되었다고 한다. “이북에는 친척이 없어, 이곳 덕양이 내 고향이지. 이곳에는 친구들도 많고 자식들도 남한에 살고 있으니 금강산에 가라고 해도 안 갔어.” 한다.

할머니 말에 의하면 여수에는 황해도 출신이 많다고 한다. 할머니는 고향 생각이 들었는지 혼자말로 ‘해주 사람들이 즐겨 먹는 녹두묵 참 맛이 있어.’라고 중얼거렸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할머니들 왈, ‘해주할머니 때문에 우리들도 해주 묵을 먹어 보았지.’ 한다. 해주할머니는 혼자서 묵을 만들어 팔아 자식들 뒷바라지해 온 수십 년 세월을 재미있게 들려주었다. 할머니 목소리에는 황해도 투의 억양이 아직도 남아 있지만 덕양은 할머니의 몸과 마음의 고향으로 되어 버린 지 오래되었다. 마지막 말이 “덕양을 떠나고 싶지 않아, 덕양은 내 고향이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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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중인 해주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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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3.05.24 역사명 수정 '여수역'을 '여수엑스포역'으로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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