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6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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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信興旌閭 |
이칭/별칭 | 효자 박신흥 정려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오가면 원천3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해준 |
건립 시기/일시 | 1747년 - 박신흥 정려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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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시기/일시 | 1959년 - 박신흥 정려 이전 |
현 소재지 | 박신흥 정려 - 충청남도 예산군 오가면 원천3리 |
원소재지 | 박신흥 정려 - 충청남도 예산군 오가면 원천리 안샘골 아래쪽 산자락 |
성격 | 정려 |
양식 | 겹처마 맞배지붕 |
정면 칸수 | 1칸 |
측면 칸수 | 1칸 |
소유자 | 박종석 |
[정의]
충청남도 예산군 오가면 원천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효자 박신흥의 정려.
[개설]
박신흥 정려는 조선 후기에 예산군에 살며 부모에 대한 효도와 임금에 대한 충성을 다하였다는 박신흥의 행적과 포상에 대한 내용이 있는 정려이다. 박신흥은 본관이 밀양으로 어려서부터 효성스러웠다고 한다. 병석에 누운 어머니가 물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자 물고기가 튀어 올라 어머니를 봉양하였다고 전하며 아버지가 죽자 일갑자, 즉 60년이 되어도 초상 때처럼 예를 다하였다고 한다. 또한 숙종과 경종이 죽었을 때는 자리를 깔고 주야로 통곡하였고 무신란이 발생하자 난이 평정되기를 빌며 하늘에 기도하였다고 한다.
박신흥의 행적이 알려져 1723년(경종 3) 상물 포상을 받고, 1747년(영조 23) 정려를 받았다. 이후 1754년 가선대부, 가선대부 행용양위부호군, 1756년 통정대부, 1757년[영조 33] 가의대부 동지중추부사 등을 가자받았다.
[위치]
박신흥 정려는 원래 예산군 오가면 원천리 안샘골 아래쪽 산자락에 있었으나 1959년 말부터 시작된 예당수리조합 건설공사로 원천3리 마을 입구로 옮겼다.
[형태]
박신흥 정려각 내부의 중앙 상단에 정려가 걸려 있는데 1747년 내려진 ‘충신 효자 박신흥지문 상지이십삼년정묘십일월 일(忠臣孝子朴信興之門上之二十三年丁卯十一月 日)’이라고 쓰여 있다. 내부에 세워진 정려비의 정면에는 ‘충신 효자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박신흥지려(忠臣孝子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朴信興之閭)’라고 쓰여 있다. 비 뒷면에도 비문이 있으나 훼손이 심하여 알아보기 어렵다. 정려는 정면 1칸, 측면 1칸이며 겹처마에 맞배지붕 양식을 하고 있다.
[현황]
박신흥 정려 측면에는 소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으며 현재는 후손들이 관리하고 있다. 후손들은 정려를 보호하기 위해 좌우 박공 아래로 방풍판을 설치하였다. 박신흥의 사당은 원천3리 안샘골 입구에 있는데 좌우 한칸에 맞배지붕을 올렸고 기둥에는 주칠을 하였다. 사당 인근에 박신흥의 묘가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오가면 신장1리에 사는 후손 박종석이 위패를 모셔가 명절마다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박신흥의 충효 행적과 정려 청원에서 명정까지의 과정을 보여 주는 고문서들이 보존되어 있다. 정려를 청하는 상서가 6건[수령에게 올린 3건, 관찰사에게 올린 3건], 교지 10건, 완문 1건, 정려 이후 명정에 따른 복호가 제대로 되지 않아 후손들이 진정을 하는 문서가 7건[수령에게 4건, 관찰사에게 1건, 암행어사에게 1건, 기타 1건] 등이다. 본래 사당 내 있던 상서와 문서는 현재 후손이 위패와 함께 보관 중이다.
[의의와 평가]
박신흥의 정려는 조선 후기 효자 정려의 형태를 잘 알려 줄 뿐만 아니라 정려를 청하는 문서가 함께 남아 있어 가치가 높은 문화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