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6007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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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春元 |
영어공식명칭 | Lee Choonwon |
이칭/별칭 | 원길(元吉),구원(九畹)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고수연 |
출생 시기/일시 | 1571년 - 이춘원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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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90년 - 이춘원 사마시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96년 - 이춘원 정시 문과 병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97년 - 이춘원 광양현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07년 - 이춘원 동래부사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13년 - 이춘원 좌승지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17년 - 이춘원 충청도관찰사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620년 - 이춘원 지돈령부사 임명 |
몰년 시기/일시 | 1634년 - 이춘원 사망 |
출생지 | 이춘원 출생지 - 서울특별시 중구 |
거주|이주지 | 이춘원 거주지 - 서울특별시 중구 |
거주|이주지 | 이춘원 거주지 -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
묘소|단소 | 이춘원 묘소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금남리 산56-9 |
성격 | 문신|학자 |
성별 | 남 |
본관 | 함평(咸平) |
대표 관직|경력 | 좌승지|병조참의 |
[정의]
조선 후기 예산에 기반을 두고 활동한 문신.
[개설]
이춘원(李春元)[1571~1634]은 조선 후기 문신으로, 1613년(광해군 5)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에 반대하다가 파직되었다. 예산군 고덕면 일대에는 함평이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는데 이춘원의 할아버지인 이윤우(李允宇)가 거주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이윤우의 집에 거주하였던 이춘원은 관직에 나간 후에 예산에 거처를 마련하여 한성부에 거주하면서 틈틈이 내려와 휴양하였다고 한다.
[가계]
이춘원의 본관은 함평(咸平)이며 자는 원길(元吉), 호는 구원(九畹)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좌통례에 증직된 이세달(李世達)이고, 할아버지는 현감 이윤우이며, 아버지는 좌찬성에 증직된 이창(李瑒)이다. 어머니는 중종(中宗)의 부마인 능창위(綾昌尉) 구한(具澣)의 딸 능성구씨(綾城具氏)이다.
[활동 사항]
이춘원은 1571년 한성 훈도방 경제[현재 서울의 남산 및 중부경찰서 부근]에서 출생하였다. 이춘원의 할아버지인 이윤우가 덕산현 고산[현 예산군 고덕면 몽곡리]에서 기반을 잡아 살면서 예산과 인연이 시작되었다. 이춘원은 할아버지 이윤우의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6세 연상이었던 사촌형 용계 이영원과 사귀게 되어 이후 학문적 동지로 지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벼슬길에 나간 후에도 예산에 거처를 마련하고 틈틈이 휴양하였다.
이춘원은 1590년 20세 때 사마시에 급제하였다. 1596년(선조 29)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1597년 정유재란 때 광양현감으로 나가 남원을 포위한 왜군과 싸웠다. 1602년 진청관(陳請官)으로 중국을 다녀온 뒤 1603년 문학을 거쳐 병조정랑이 되었으며 어사(御史)를 제수받고 호서에 내려갔다. 1604년 성균관사예, 1605년 장흥부사로 나아가 청백리로 선정되었다. 1607년(선조 40) 7월 특명으로 정3품에 올라 동래부사로 부임하여 부산 곳곳을 돌면서 백성을 위로하고, 해운대·태종대·몰운대·겸호대·동래 온정·정과정 등 동래 지역의 여러 명승과 고적을 둘러보았다. 이때 본 것들을 시로 써서 문풍(文風)을 일으켰다.
이춘원은 1609년(광해군 1) 사직하고 병든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얼마 후 우승지에 제수되었으나 1610년 모친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를 살았다. 1613년 좌승지일 때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해야 한다는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를 반대하다가 파직되었다. 이듬해 승지로 복관되고, 병조참의를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품계가 올랐다. 1616년 오위도총부부총관, 분조참판(分曹參判)으로 재직하였다. 1617년(광해군 9)에는 충청도관찰사로서 대북파 권신들이 인목대비의 존호를 폐하고 대비에 대한 의식을 없애려고 하자 또 다시 극구 반대하여 파직당했다.
1620년(광해군 12) 지돈령부사가 되어 명나라의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안주에 파견되었다가 1621년 안주의 백상루(百祥樓)에서 갑자기 중풍에 걸려 신체의 오른쪽을 못 쓰게 되어 벼슬을 내놓고 돌아왔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직후 인조(仁祖)가 구신(舊臣)들을 많이 등용하면서 한직(閑職)을 주었으나 사양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사직 후 시로 세월을 보내다가 1634년 7월 26일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남양의 홍지성(洪至誠)에게 글을 배우고,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인 박순(朴淳)이 영의정을 그만두고 영평(永平)에 은거할 때 박순을 찾아가 다시 배워 학문에 두각을 보였다. 문집으로 『구원집(九畹集)』[4권 2책, 목판본]이 전하는데 1656년(효종 7) 제자들이 편집·간행하였다. 권1~3에 시, 권4에 잡저(雜著)를 수록하여 대부분 시를 위주로 실었으며, 부록으로 행장·신도비명·치제문(致祭文)·만사·제문이 있다. 이춘원의 시는 화려하지 않으나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깊은 뜻이 나타나 있어 많은 사람에게 널리 읽혀졌다고 한다.
[묘소]
이춘원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금남리 산56-9번지 함평이씨 묘역 내에 있으며, 정부인 해평윤씨와 합장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