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9040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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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閔世植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경기도 용인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종구 |
출생 시기/일시 | 1912년 1월 12일 -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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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41년 3월 18일 - 용인보통학교 졸업 |
활동 시기/일시 | 1935년 - 아버지를 따라 용인으로 이사 |
활동 시기/일시 | 1947년 - 대한청년단 부단장으로 방위군 장교가 됨 |
활동 시기/일시 | 1950년 5월 3일 - 용인군 청년방위대장에 임명 됨 |
활동 시기/일시 | 1951년 5월 - 다시 청년 운동을 시작 |
활동 시기/일시 | 1952년 - 용인면 지방의원으로 당선 |
활동 시기/일시 | 1953년 - 용인군 12개면에서 용인군 특동대를 조직 |
몰년 시기/일시 | 1983년 11월 30일 - 졸 |
추모 시기/일시 | 음력년 11월 29일 |
출생지 | 민세식 출생지 - 황해도 벽성군 추화면 학남리 29번지 |
거주|이주지 | 용인군 용인면 고림리 448번지 |
묘소 |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주북리 |
성격 | 사회운동가 |
성별 | 남 |
본관 | 여흥 |
대표 경력 | 용인군 특동대장, 면의회 의원 |
[정의]
경기도 용인군에서 6.25전쟁 당시 북한군에 대항하고 치안을 유지하기 위한 특동대의 대장.
[가계]
본관은 여흥이며 농사를 짓던 부친 민영복의 5남매 중 둘째이며, 봉화 금씨 사이에 3남 3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1926년 황해도에서 태어나 1935년 아버지를 따라 용인으로 이사하였다. 용인보통학교 2학년으로 전입학하여 1941년 3월 졸업하고 가사일을 도우며 강의록을 공부하였다.
18세 되던해 용인 하우마조합(荷牛馬組合) 서기로 취직하여 근무하였다. 하우마조합이란 우마차(牛馬車)를 등록하여 유사시 동원했던 조직으로 경찰서장의 휘하에 있었으므로 경찰서 내에서 근무했으며 경찰들과 친분을 쌓게 되었다.
이때 민세식은 독립운동가를 체포하라는 기밀문서를 보고 우리가 식민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어느 날 일왕(日王)의 사진이 있는 신문[1944년 1월1일]에 “급살병(急煞病)으로 죽어라”라고 적었던 것이 들통이나 사상범으로 낙인찍혀 갖은 고초를 격고 사퇴하였다.
광복 후 좌우익 충돌당시 우익편에서 좌익들과 싸움을 하다가 우익단체인 대동청년단 용인군 훈련부장이 되어 활동하였다. 이후 훈련부장으로 대한청년단 배속장교 교육대에 입교하여 훈련을 마치고 용인군에 배속된 후 각면 청년단원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켰다. 1947년 대한청년단 부단장으로 방위군장교 교육훈련에 참가해 방위군 장교가 되었고, 용인군 각 면에 지대를 설립하여 지대원들에게 실제 총 대신 목총으로 전투훈련을 시키며 반공정신 함양에 노력하였다.
1950년 5월 3일 전국에 청년방위대가 조직되자, 민세식은 용인군 청년방위대장에 임명되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대구전투에 참가했고, 미8군 1사단 2연대 정보주임장교[일명 팔공산(八公山)]부대로 활동하다 방위군 사건으로 방위군이 해체되자 방위군 생활을 마감하였다. 1951년 5월 다시 청년 운동을 시작하면서, 용인군단 부단장, 용인군 농민회 부회장으로 활약하였다. 1952년 용인면 지방의원으로 당선되어 지방의원으로 활동했으며, 1953년에는 용인군 12개면에서 20-30세 청년들로 조직된 용인군 특동대를 조직하여 전투훈련을 시키다가 휴전을 맞았다.
5.16정변 후 이태리포플러를 심어 우리나라에 이태리포플러를 보급하기 위하여 노력했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백령도에서 주석 광산업을 했는데, 광산업은 어느 정도 성공하였으나 얼마후 주석을 싣던 배가 침몰하여 사업이 실패하게 되었고 비참한 생활을 하다 1983년 지병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저술 및 작품]
민세식은 개인 노트에 간단한 자서전을 남겼으며, 용인군 특동대의 대장으로 활동하면서 기록한 대원 명부를 남겼다.
[묘소]
민세식의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주북리 선향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