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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03037
한자 麗水樂工廳關聯資料一括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문서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우두리 1049[강남로 31]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주석봉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2008년 12월 26일연표보기 - 여수 악공청 관련자료일괄 전라남도 민속문화재 제45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여수 악공청 관련자료일괄 전라남도 민속문화재 재지정
성격 유물
관련 인물 이홍근|김용찬|오부용|김은섭|김달삼
용도 제례용현판|기념현판
발급자 여수 악공청
수급자 여수 악공청
문화재 지정번호 전라남도 민속문화재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에 있던 악공청과 관련된 자료 일괄.

[개설]

여수에는 악공청(樂工廳)이라 불리는 음악기관이 있었다. 악공이란 관아에서 음악을 담당하던 음악인을 지칭하며, 원래 악공청이 있는 곳은 여수 진남관의 왼쪽(동쪽) 뒤쪽이다. 이런 입지 조건으로 볼 때에 악공청이 과거 관아와 관련 있던 기관임을 알 수 있다. 『호좌수영지(湖左水營誌)』를 보면, 취군(吹軍)이 131명, 기생(妓生)이 37명, 무녀(巫女)가 46명, 취타수(吹打守)가 35명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들은 군악대 역할을 포함해 전라좌수영의 각종 행사에 동원돼 음악과 연희를 담당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각 군현의 관청은 갑오개혁 이후 지방제도가 정비되면서 기능이 축소되었거나 악화되다가 일제강점기에 관청소속 음악인들의 조직도 해체되었지만 여수의 경우 일제강점기에 악공청이 재건되었다. 다른 지역에서는 해체되면서 종지부를 찍었지만 여수에서는 악공청이 재건되고 이후에도 활동이 지속되었다. 1939년에 만들어진 악공청은 이전 시기 좌수영 소속의 기관과 긴밀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기록에 보이지 않지만 본래 있던 악공청은 해체되고 이후에 중수된 것이 현재의 악공청일 가능성이 크다.

[제작 발급 경위]

자료 1 : 위패가 세 줄로 정렬된 선생안 현판.

자료 2 : 무진년 간지가 있는 선생안 현판.

‘선생안’(先生案)은 원래 관아에서 전임(前任) 관원의 성명, 직명, 본적 등을 기록한 책을 말하며 안책(案冊)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선생안을 현판으로 만들어 걸어 놓고 제사를 지낼 때 위패처럼 사용하기도 했다. 이런 방식이 악공청에서 사용된 것은 관아 풍속의 영향을 받아서다. 각 군현의 악공청에서는 선생안을 마련해두고 절기에 맞춰 제례를 성대하게 지냈다. 즉 자료1과 자료2는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제작하였다.

자료 3 : 악공청수혜서(樂工廳樹惠序) 현판.

악공청수혜서의 제작 시기는 1939년이다. 그러므로 여수 악공청은 갑오경장(1894년) 이후 45년 만에 재건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악공청수혜서의 방명록에는 여수의 명망가 8명의 이름이 기록돼 있는데 지역사회의 후원을 받아 악공청이 재건 되었음을 말해준다. 악공청을 재건할 때 후원해준 여수 지역 유지들의 고마움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하였다.

자료 4 : 동반(同班) 중에서 재물을 희사한 사람의 내력을 적은 제목 없는 현판.

김소점이란 동반의 여자가 금 30돈을 희사한 것을 기념해 만든 현판이다.

[형태]

자료1 : 위패가 세 줄로 정렬된 선생안 현판.

자료1의 선생안은 가로 65㎝, 세로 250㎝, 두께 13㎝의 나무틀 안에 가로로 세 줄의 나무 위패가 정렬돼 있다. 앞에는 위패들을 가릴 수 있도록 네 개의 미닫이가 달려 있다.

자료2 : 무진년 간지가 있는 선생안 현판.

자료2의 선생안은 가로 68㎝, 세로 180㎝, 크기의 나무 현판이다. 흰 바탕에 가로 두 줄로 이름을 써넣었다. 테두리에는 붉은 색 물감으로 문양을 넣어 장식했다. 오른쪽에 ‘무진년십일월이십칠일선생안(戊辰年十一月二十七日先生案)’이란 제목이 쓰여 있다. 무진년은 현판의 상태로 볼 때 1928년인 것으로 짐작된다.

자료3 : 악공청수혜서 현판.

자료3은 ‘악공청수혜서’란 제목이 붙어 있는 현판이다. 1939년에 악공청을 건립하면서 제작한 현판인 것으로 추정된다. 세로글씨로 적혀 있다.

자료4 : 동반(同班) 중에서 제물을 희사한 사람의 내력을 세로로 적은 제목 없는 현판.

[구성/내용]

자료1 : 현판에 나무 위패를 세 줄로 정렬해 놓은 현판으로 78개의 위패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두 세습무계 무부들의 위패이다. 맨 윗줄에는 27개의 위패가 있고 중간 줄에 32개, 아랫줄에 19개가 있다.

자료2 : 현판에 나무 위패를 두 줄로 정렬해 놓은 현판으로 총 71개의 위패로 구성되어 있다. 윗줄에는 38명, 아랫줄에는 33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런데 윗줄 2명과 아랫줄 1명의 이름이 지워져 있다. 해당 인물의 후손들이 선조의 무속활동을 창피하게 여겨 그 흔적을 없애기 위해 지운 것이라고 한다. 두 선생안에서 중복되는 이름은 56명이다. 자료1의 22명과 자료2의 15명(3명은 삭제)은 중복되지 않는 이름이다. 이들 이름 중에는 돌림자로 짐작되는 경우가 적지 않아 친족 관계에 있는 인물들이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자료3 : 자료3의 번역 내용은 ‘음율이 대개 악부로부터 나왔으니 상하의 잔치에 감흥의 일어 남이 여기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다. 갑오경장 이래로 지금까지 악공의 대업이 오랫동안 적요한 나머지, 비록 잔약한 무리지만 어찌 감흥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이런 까닭에 이제 악사를 만들고 몇 칸의 작은 집을 사서 ㅇ습(ㅇ習)하는 곳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 집이 지금 … 비용이 전혀 … 어찌 여러 여러 차례의 큰 재앙 때 … 그 공업(工業)에 힘쓰니 이제 … 곧 옛날의 음율이다. 해옥(該屋) … 만약 위가 줄고 아래가 더해진다면 … 어찌 … 아니겠는가. 보시의 대재(大灾) … 마땅히 기념의 뜻을 여기에서 오래도록 기려야 하지 않겠는가’.

소화 14년(1939) 윤 4월 14일

방명록 : 김한승씨, 유국준씨, 최석주씨, 박대원씨, 김영준씨, 이우헌씨, 이기래씨, 장재후씨.

발기인 : 이홍근, 김용찬, 오부용, 김은섭, 김달삼, 함양인 박종관 탈필.“

이 현판의 방명록에 오른 사람들은 1930~1940년대 여수 명망가 들이다. 김한승은 교육활동에 기여한 인물로서 사립 경명학교, 여수간이수산학교 등의 설립에 공헌을 했다. 유극준은 여수의 최고 인텔리로 꼽히던 인물이다. 최석주는 여수 유림의 대표자였다. 김영준은 입지전적인 사업가다. 1935년에 여수에 천일고무공장을 세워 3년 만에 굴지의 대기업으로 키웠다. 1938년에 여수 미평학교를 설립했고 광복 후 여수에 한국원양어업회사, 제지공장, 직물공장 등을 세우는 등 실업가로 활동했다. 이우헌은 여수의 요직을 두루 거치고 국회의원을 두 번 역임한 정치가다. 장재후는 여수 시내버스 창립자다. 위의 기록으로 볼 때 여수의 정치, 경제, 사회 전 분야의 유지들이 악공청 건립에 후원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악공청이 무부들의 단순 결사체가 아니라 지역의 문화예술 활동에서 나름의 역할을 하던 기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관아의 공적인 활동이 끊긴 상태지만, 지역사회의 각종 행사에서 이들의 활동이 지속되었으며, 그것에 대한 지지와 후원도 계속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악공청 사람들이 유지들의 각종 연회에서 예능을 제공해온 전통이 있으므로 그런 차원에서 유지들의 후원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악공청 중수에 발기인으로 참여한 사람들은 5명이다. 이들은 무계 출신 예인들이다. 당시 이들이 여수 악공청을 이끌던 대방급의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중에서 오부용은 여수 악공청의 마지막 대방이었던 방종선의 장인이며, 김달삼은 오부용의 사위이자 방종선의 손위 동서이다.

자료4 : 자료4의 번역 내용은 ‘본청(本廳)이 창설된 동반(同班) 가운데 김소점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나이는 육순이 넘었고 처음부터 일 개의 혈육도 없는 혈혈단신(孑孑單身)이었다. 그 신후(身後)의 유감(遺憾)을 불쌍히 여겨서 … 금 30돈을 동청(同廳)에 주었으니, 몸이 비록 여자이지만 그 지보(指補)하는 바의 마음을 끝내 잊을 수 없기 때문에 … (同班에서) 특별히 신후의 정을 생각하여 크게는 백세후 … 부모상을 당하는 날에 즉 그 식본(殖本)을 취하여 … 즉 이로써 영구히 시행하여 뜻을 잊지 않겠다고 이름. 세재 무진 12월 16일(음력) 악공청 동반 일동’.

[의의와 평가]

악공청은 그 역사성에도 불구하고 악공청 조직이 오래 전에 와해되거나 잊혀 졌다는 것이고, 관련 유형물도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런 맥락에서 여수 악공청의 선생안과 관련 기록들에는 악공청집단의 역사를 밝힐 수 있는 귀중한 물적 증거뿐 아니라, 여수 지역 토호들의 지원세력이 물증으로 남아 있으며, 당시 사회가 악공청집단에게 부여한 실증적 자료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매우 크다. 그동안 ‘여수 악공청 관련 자료일괄’은 동산동 457번지[진남로 97-1]에서 보관하였으나, 건물이 철거되어 2010년 2월 22일부터 여수시청 3청사 수장고에서 보관하고 있다. 2008년 12월 26일 전라남도 민속문화재 제45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전라남도 민속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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