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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주사 이공기신 송덕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31327
한자 前主事李公起申頌德碑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비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손죽새터길 28-7[손죽리 산1103]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유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931년연표보기 - 전 주사 이공기신 송덕비 건립
현 소재지 전 주사 이공기신 송덕비 -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손죽새터길 28-7[손죽리 산1103]지도보기
원소재지 전 주사 이공기신 송덕비 -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손죽새터길 28-7[손죽리 산1103]
성격 송덕비
관련 인물 이기신|이기헌
재질 화강암|오석
크기(높이, 너비, 두께) 297㎝[총 높이]|137㎝[비석 높이]|51㎝[너비]|22㎝[두께]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손죽리에 있는 일제 강점기 때 세워진 이기신 송덕비.

[건립 경위]

전 주사 이기신(李起申)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문중에서 전 주사 이공기신 송덕비(前主事李公起申頌德碑)를 건립하였다.

[위치]

전 주사 이공기신 송덕비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손죽새터길 28-7[손죽리 산1103]에 서 있다.

[형태]

화강암으로 된 기단과 비석이 있으며, 비신은 오석으로 되어 있다. 총 높이는 297㎝이며, 비석 높이는 137㎝, 너비는 51㎝, 두께는 22㎝이다.

[금석문]

비신 전면 중앙에는 ‘전 주사 이공기신 송덕비(前主事李公起申頌德碑)’, 우측면에는 “백양국추[가을철] 족형 승훈랑 국자박사 기□□ 기록하다. 개국기원 후 540년 신미 가을 손죽리 종족 일동 창립(白羊菊秋 族兄 承訓郞 國子博士 起□□識 開國紀元後 五百四十年 辛未 秋 巽竹里 宗族 一同 炷立)”이라고 쓰여 있다.

후면에는 “사람에게 하나의 선행이 있어 그것을 기록하자면 반드시 상을 주고 널리 알리니 혹 책에 인쇄하고 혹 비석에 새겨서 썩지 않도록 도모한 것이니라. 옛날 범 문정공이 산비탈 밭 천 이랑으로 여러 친족을 구제하였으니 날마다 먹이고 해마다 옷 입히고 결혼과 애경사에도 다 넉넉히 도우니 부르기를 의장이라 하니라. 당시 문인이 실적을 기록하여 기리고 후생들로 하여금 본보기로 하더니 세상의 급이 점점 내려가고 사람의 벼리가 닦이지 않아, 친근한 가족 보기를 저 멀리 길가는 사람같이 보고 이득을 보면 의리를 잊음이 왕왕 있어 형제간에 전답으로 싸우는 폐단이 어찌 마음 상하고 아프지 않으리오 훌륭한 나의 족제 기신 씨와 함께 이 선황 여파로 호남에 흘러들어 전한 지 56세에 이르니 세상에 효우가 들리므로 한 고을의 법가로 삼고 또 후손이 번창하여 종친의 마을에 함께 살다가 스스로 화수의 이웃을 만들어 원원상상에 기쁜 정이 흡족하니라.

또 남편이 젊은 나이에 집안을 이어 하나같이 선조의 법도를 따르니라. 근검히 집안을 다스려 점점 가산이 윤택해지고 그 선조 받들어 분묘와 비석의 거칠고 무너진 것을 혼자 스스로 힘을 내 봉분을 고치고 비를 바르게 세우며 제각을 창립하여 춘추 향사에 힘써 정성을 다하고 그 어버이를 섬김에 자식의 직분을 다하여 살아서는 지체의 봉양을 갖추고 죽어서는 풍수지탄을 더하며 영당을 경영 건립하여 조석으로 알현함을 혼정신성과 같음이 있어 종신지모를 붙이고 그 족당에 돈서지의를 마음과 힘을 다하지 않음이 없고 가난하여 어려운 자를 돕고 또 시집 장가갈 때를 놓친 자를 스스로 찾아가서 넉넉히 돕지 않음이 없었다.

지난 무오년 가을에 그 친족 34호를 헤아려 특별히 의금 3,400냥을 내어 모든 집에 100냥씩 고르게 배분하고 일계를 만들어 합쳐 이름하여 의장계라 하고 해마다 이자를 길러 수만금에 이르도록 많으니 그 원금은 두고 이자를 가지고 땅을 사고 그 땅에서 나온 것을 또 해마다 거두어 모아 구활의 재물로 삼으니 이 어찌 영원한 계획이 아니리오? 그 규모가 의장의 제도를 따르고 아울러 재물을 번식하니 도리어 의장보다 나으니라. 몇 년이 더 지나가면 거의 가히 집집마다 다 좋게 만들 수 있음을 보리니 친척들이 감격하여 노래하지 않음이 없어 다 공의 은혜에 힘입어 죽음에 임박한 자가 부활하고 극빈자가 점점 넉넉해지니 가히 지금 세상에 생불이라 이르니라. 이 생명의 은혜를 어찌 보답할꼬? 의논하여 비를 세워 일세에 표창하여 영원히 빛내는 것이 우리들의 결초의 정성이라 하고 기채로 하여금 천리 길을 걸어와 나에게 글을 부탁하거늘 그 종족을 두텁게 하는 의와 선을 기리는 도에 의리로 감히 사양하지 못하여 대개를 간략히 살펴 기록하노라[人有一善一行之可記者必褒獎而發揮或謄諸簡冊或刻于貞珉以偏不朽者也昔范文正公有負郭田千畝以濟群族日有食而歲有衣至於嫁娶哀慶皆有贍助號曰義庄當時文人記實以褒之彭爲後生之矜式世級漸降人紀不修其視親近之家族有若疎遠之路人見利忘義往往有果墻爭田之弊寧不傷痛乎膳我族弟起申甫同是璿璜餘派流客湖南傳至五六世世以孝友聞爲一鄕之法家且子姓蕃衍同居桑梓之里自作花樹之隣源源常常歡情洽然且君妙齡承家一遵先憲勤儉治家稍爲潤産其奉先也墳墓碑碣之荒頹者獨自出力改封而整竪炷立祭閣春秋享祀務盡誠敬其事親也缸竭子職生而備志物之養沒而添風樹之慟營建影堂朝夕瞻謁有若定省然以寓終身之慕其於族黨也敦敍之誼靡不用極貧潞之難保者及嫁娶之失時者無不自 而優助焉往在戊午秋計其族三十四戶特出義金三千四百兩每戶均排以一百兩合成一己名曰義庄己逐年殖利至於數萬金之多存其本而取其利使之買土厥土之所出亦年年收聚以爲救活之資玆豈非永遠之計耶盖規模一從義庄之制而兼之以殖貨反有勝於義庄差過幾年庶可見比屋皆封矣諸族莫不感頌咸曰賴君之惠濱死者復活極貧者稍饒可謂今世之活佛此生此恩何以報答議竪一碑表彰於一世以耀無窮此吾輩結草之泡使起采千里塗足屬余以文其於敦宗之誼褒善之道義不敢辭略撮大槪而記之云爾]”라고 쓰여 있다.

[현황]

2022년 6월 현재 전 주사 이공기신 송덕비의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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