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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31328
한자 昌原黃致淵妻金海金氏貞烈碑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비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 복산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유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926년 10월연표보기 - 창원 황치연처 김해김씨 정렬비 건립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845년 - 김해김씨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907년 3월 23일 - 김해김씨 사망
현 소재지 창원 황치연처 김해김씨 정렬비 - 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 복산리 1709-9지도보기
원소재지 창원 황치연처 김해김씨 정렬비 - 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 복산리 1709-9
성격 정렬비
관련 인물 황치연|김종한|김해김씨
재질 화강암
크기(높이, 너비, 두께) 248㎝[총 높이]|150㎝[비석 높이]|46㎝[너비]|22㎝[두께]
관리자 창원황씨 문중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 복산리에 있는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황치연의 처 김해김씨의 정렬비.

[개설]

김해김씨(金海金氏)의 아버지는 김재택(金在澤)이고, 남편은 황치연(黃致淵)으로 본관은 창원(昌原)이다.

[건립 경위]

김씨 부인의 정과 뜻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이 창원 황치연처 김해김씨 정렬비(昌原黃致淵妻金海金氏貞烈碑)를 건립하였다.

[위치]

창원 황치연처 김해김씨 정렬비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 복산리 달천노인회 도로변에 서 있다.

[형태]

기단석과 비신, 비갓이 잘 갖추어져 있으며, 총 높이는 248㎝이며, 비석 높이는 150㎝, 너비는 46㎝, 두께는 22㎝이다.

[금석문]

비신 전면 중앙에는 ‘창원 황치연처 김해김씨 정렬비(昌原黃致淵妻金海金氏貞烈碑)’라고 쓰여 있다.

후면에는 “여수 소라 고을에 돌이 우뚝 솟아 있어 지나는 자 그곳을 가리키며 감탄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것이 정렬부인 김해김씨의 비이니라. 씨는 탁영 선생 휘 일손의 후손 재택의 딸이요, 효정공 진의 10세손 창원 황치연의 처라. 아름답고 유순하고 정일하여 능히 부덕을 짝하더니 나이 스물셋에 갑자기 남편이 죽으니 슬픔이 법도를 넘어 예로 뜻을 다하니 외롭게 혼자 된 한 몸이 연명할 수 없어 남편 숙부 집에 가 의지하여 얼마 안 되어 유복 아들을 얻으니 친척이 개가할 것을 권하니 드디어 친가로 돌아가니 부모님도 뜻을 빼앗으려 하거늘 이로부터 늘 한곳에 기거하지 않고 혹은 남편 집에 혹은 친정에 절구질과 베 짜는 일이며 땔나무와 나물 캐는 일로 근근히 집을 꾸리고 며느리를 맞아 집에 들여 자손이 있더라. 나이 예순셋에 아들과 손자에게 이르기를 당초에 죽지 못함은 뱃속에 핏덩이더니 지금 너희들이 장성하니 뜻한 바대로 원하던 것이 끝나니라 드디어 세수하고 머리 빗고 옷을 차려입고 죽으니 정미 3월 23일이니라. 그 맏이 유수가 나에게 비명을 지어 줄 것을 요구하거늘 명에 이르나니, 성품은 따뜻한 구슬 같고 행실은 차고 맑아 서리와 눈이라. 천명은 어찌 인색하며 뜻은 어찌 열녀인가? 가만히 죽으니 선녀의 반열에 오르니라. 보답이 자손에 있으니 비를 우뚝 세우노라. 병인 10월 일. 숭록대부 예조판서원임 규장각직제학 안동 김종한 지음[麗水召羅鄉有石屹然過者無不指點咨嗟是貞烈婦金海金氏碑也氏濯纓先生諱馹孫后在澤女孝貞公璡十世孫昌原黃致淵妻徽柔貞一克配婦德年卄三奄哭所天哀逾制禮盡情□獨一身無以為命往依夫叔父家未幾舉遺服男族親觀改節遂歸親家父母欲奪志自是不常厥居或夫黨或親家舂織樵採斤斤為家迎婦入門有子有孫年六十三詔兒孫曰當初未亡以為腹中血今汝輩長成志願畢矣遂盥櫛盛服而逝丁未三月二十三日也其嗣遺秀要余為銘銘曰 性如溫玉行凛霜雪命胡其嗇志何其烈 翛然而化上仙女列報在兒孫有碑其屹 柔兆攝提格 十月 日 崇祿大夫 禮曹判書原任 奎章閣直提學 安東 金宗漢 撰]”이라고 쓰여 있다.

[현황]

2021년 6월 현재 창원 황치연처 김해김씨 정렬비는 비각을 세워 잘 보존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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