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렉토리분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31332
한자 孝烈婦慶州鄭氏行蹟碑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비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죽포리 781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유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940년 9월 19일연표보기 - 효열부 경주정씨 행적비 건립
현 소재지 효열부 경주정씨 행적비 -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죽포리781지도보기
성격 행적비
관련 인물 경주정씨|이병관|조영재
재질 화강암|오석
크기(높이, 너비, 두께) 463㎝[총 높이]|233㎝[비석 높이]|84㎝[너비]|54㎝[두께]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죽포리에 있는 일제 강점기 때 세워진 효열부 경주정씨 행적비.

[건립 경위]

바느질과 길쌈을 생활 수단으로 하면서 어려운 가계를 꾸려 나가고, 생활이 점차 윤택해지자 불우한 이웃을 돕기 시작하여 많은 사람들을 구제한 경주정씨(慶州鄭氏)의 시혜와 효열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효열부 경주정씨 행적비(孝烈婦慶州鄭氏行蹟碑)를 건립하였다.

[위치]

효열부 경주정씨 행적비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죽포리 781번지에 서 있다.

[형태]

화강암과 오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총 높이는 463㎝이며, 비석 높이는 233㎝, 너비는 84㎝, 두께는 54㎝이다.

[금석문]

비신 정면에는 ‘효열부 경주정씨 행적비(孝烈婦慶州鄭氏行蹟碑)’라고 새겨져 있다.

좌측면 우측 상단에는 “효열부자손칭송문(孝烈婦子孫稱頌文). 효열부의 훈계지도가 올바르고 인자하신 모성애에 감화된 장자 오산조공천섭씨는 어머님께 극진한 효행을 하심에 따라 그의 배필이신 류씨 부인께서도 시모님과 시조부님께 효도를 극진히 하고 또한 형제간에 우애를 잘하였기로 이 고장 자랑거리로 남게 되었다. 오산조공천섭씨는 타고난 훌륭한 성품으로 벗과 이웃을 사랑하고 청렴결백을 생활신조로 삼고 구김새 없는 훌륭한 생애를 보내셨기로 그 동안에는 광주상공회의소 회장으로 피선되어 사심없는 운영에 많은 상공업자들로 하여금 칭송을 받았었다. 자고로 왕죽밭에서 왕죽이 나온다는 말이 있듯이 효열부 밑에 효자효부가 나오고 하는 것은 천정진리라고 생각하며 인간은 참된 마음에서 세상을 살아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고귀한 것인가를 깨닫게 해 주시는 오산조공천섭씨의 모든 거동에 앞으로 더욱 그리는 마음 짙게 할 것이다. 친지 김진기 근찬”이라고 새겨져 있다.

좌측면 좌측 상단에는 “효열부정씨내력(孝烈婦鄭氏來歷). 단기 42○2년 오월 이일 광양군 옥룡면에서 출생하여 단기 4218년 6월 18일 여천군 돌산읍 죽포리 옥천조씨 병세씨와 혼인하여 슬하에 천섭 홍섭 지섭 삼형제를 두었다. 단기 424○년 6월 26일 지아비가 서거하자 이후 효열부정씨는 어려운 가계를 꾸려나가는데 침선방적을 생활수단으로 하면서 생활이 점차 윤택해지자 불우한 이웃돕기를 시작하여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였다. 이에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뜻을 모아 정씨의 시혜를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시혜비를 세웠다. 단기 4272년 대성문학원으로부터 효열부 포창문 및 비문을 받았고 단기 4288년 12월 여천군 돌산읍 둔전리에서 서거하였다.”라고 새겨져 있다.

우측면에는 “포창문(褒彰文). 사람의 아름다운 행적과 훌륭한 행실이 세상에 본보기가 될 만하면 반드시 그것을 밝혀 드러내는 것은 실로 사회기풍을 바로 잡고 세상 사람을 교화하기 위함이다. 삼가 살펴보니 전남 유림의 추천은 여천군 돌산면에서 효열부경주정씨의 행적이다. 효열부정씨는 오위장극오의 딸로서 옥천조씨 구천 공철산과 광하를 거쳐 오위 장봉호의 아들로 태어난 병세의 부인이다. 그는 타고난 용모가 꽃봉우리처럼 단정하여 일찌기 얌전한 규수로 이름이 드러났으며 출가해서는 시부모를 잘 받들고 남편을 존경하였다. 시부모상을 당해서는 온몸을 바쳐 치상의 정성을 쏟았으며 중년에 남편이 병을 얻게 되자 지성으로 약과 음식을 정성껏 드리는 한편 밤이면 하늘에 빌어 남편의 병을 대신케 해 달라고 기원하였다. 끝내 축원의 보람이 없이 남편이 세상을 떠나니 그때 나이 삼십세로서 당장 남편을 따라 자결로 순절하려 했으나 어린 세 자식을 양육해 줄 사람이 없어 차마 순절의 길을 택하지 못하고 장례와 제례를 예법대로 거행하였다. 밤을 낮 삼아 일하며 근검한 생활을 해 나가며 세 아들을 잘 길러 내신데 온갖 힘을 기우려 왔다. 이러한 노력 끝에 살림이 여유가 생겨나자 아들을 시켜 불쌍한 사람들을 구원하게 하니 그로 인하여 공적을 기리는 시혜비가 세워지게 되었다. 그는 칠십세가 넘도록 정절이 열렬하여 해와 달처럼 빛났다. 그의 아들 천섭 홍섭도 역시 효도와 우애가 고을에서 이름 났었다. 이들에게 고을에서 표창을 한 일도 있었다. 아! 부인의 뛰어난 행실과 기특한 정절을 세상에 드러내는데 오히려 부족하도다. 그러므로 본원에서는 추천상을 보고 감동되어 그의 행적을 우선 나무에 새겨 붙이고 비각을 세우게 하여 더욱 포창하고 널리 전파하므로서 불후의 뜻을 영구히 보존하기로 유림의 의론에 따라 이를 포창한다. 공부자탄강 이천사백구십년 기묘 월 일 부원장전승지 이범석 인 고문전판서 이재현 인 고문전참판 이명상 인(孔夫子誕降 二千四百九十年 己卯 月 日 副院長前承旨 李範錫 印 顧問前判書 李載現 印 顧問前參判 李明翔 印)”이라고 쓰여 있다.

후면에는 “효열부 경주정씨 비명(孝烈婦慶州鄭氏碑銘). 매성을 이룬 여천군 돌산읍 둔전리는 죽포리로부터 뻗어내린 산과 흐르는 물이 맑고 아름다워 누성을 상징케 하며 울창한 나무들이 어우러져 멀리 바라 보이는 바닷물에 찬란함은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한다. 정씨부인은 언행이 얌전하기로 존경의 대상이 되고 모든 거동에 있어서 탄맥하고 우러러 보지않은 사람이 없으니 아름다운 행적을 영원히 칭송함이 마땅하리라. 효열부정씨는 오위장부극오의 따님으로 예도가 바른 가문에서 태어나 천성이 인자하고 정정한 몸가짐으로 덕을 쌓으니 양순한 규수로 선택을 받아 옥천조씨 구천공철산과 광하를 거쳐 오위장풍호의 아들 처세와 백년가약맺어 광양 옥룡에서 여천 돌산으로 출가하게 되었다. 시가에 들어와서는 예의범절에 밝고 제가에 조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친척간에 우애하고 남편을 공경하며 시부모님께 효도로 진성갈력(盡誠竭力)하니 향리 사림들이 칭송이 적적하였다. 시부모님 상을 당했을 때는 죽은 이의 예절에 극진하였으며, 부군께서 득병하여 눕게 되자 약수발은 물론 밤마다 남편병이 쾌유되기를 정성을 다하여 천지신명께 축수하였으나 단명한 탓인지 끝내는 천국으로 떠나고 말았다. 그때 나이 삼십여세로 의지할 곳 없는 세 자식 때문에 남편따라 순절하지 못하고 예법대로 장례를 치루었으나 생계가 어려워 침선방적으로 살림을 꾸리며 자식들의 교육에 전념하고 자기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구원하니 이로 인한 시혜비가 세워졌다. 나이 칠십세가 넘도록 청상의 몸으로 정절을 지키며 절개가 백주조같아 효열의 실행에 백발이 되도록 변함이 없었다. 그의 아들 천섭 홍섭 지섭은 인자하신 어머님의 훈도를 받들어 자식으로써의 본분을 다하였으니 이는 자친의 훈도가 올바른 데서 비롯된 것이다. 오늘에 이르러 이 비를 세워 보존코자 함은 세상의 칭송하는 여론을 저버리지 못한 때문이다. 이에 기록해 말한다. 효부여 열부여 몸과 마음가짐 정숙하고 한결 같았네, 어려운 때를 지내며 정절을 완성하고 독실한 실천으로 내실 얻었네. 자손들 어질어 돌에 새겨 향기를 남기는 나의 이 말은 넘침이 없으리라. 공부자탄강 이사구일년 경진 구월 십구일 가선대부 장례원소향원임 규장각 부제학 연안 이병관 찬 순창조씨 입돌산 도종손 조영재 건립(孔夫子誕降 二四九一年 庚辰 九月 十九日 嘉善大夫 掌禮院少鄕原任 奎章閣 副提學 延安 李炳觀 撰 淳昌趙氏 入突山 都宗孫 趙泳在 建立)”이라고 쓰여 있다.

[현황]

2021년 6월 현재 효열부 경주정씨 행적비의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