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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오도메만치(五月女滿治) 술도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E030301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 덕양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정현

예로부터 막걸리는 관혼상제나 잔치 또는 노동 때 사용하는 술이었다. 웬만한 농가나 주막에서는 수수나 보리로 막걸리를 빚어 먹거나 파는 것이 일상적이었다. 그러나 일제의 조선 강점 이후 일반 가정에서 술을 제조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일제는 한말의 주조업을 중요한 재원으로 주목하게 되었다.

1909년 「주세법」을 공포하여 주조 면허제를 시행하면서 주조업의 규모화·기업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막걸리와 소주 등은 면허를 받은 주조장에서만 제조할 수 있게 되었다. 술을 빚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자 일반 농가에서는 주조장에서 생산된 술을 사거나 단속을 피하여 몰래 빚어야만 했다. 일제가 공포한 「주세법」은 훗날 일본인들이 한국 술 시장에 침투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준 결과가 되었다.

전라남도 여수시 소라면 같은 오지에서는 술을 구입하기가 쉽지 않았다. 여수까지 30리 정도 떨어져 있는 데다 일손이 바쁜 농촌에서 술을 구하러 가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소라면에는 하나 정도의 주조장이 있어야 이 일대의 술 수요를 충족시킬 수가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단속을 피해서 밀주를 만들어 마셔야만 했다.

그러던 중 1928년 5월 일본 후쿠오카 출신이라고 알려져 있는 일본인 쇼오도메 만치[五月女滿治]가 오늘날 덕양리에 속하는 세동마을에 양조장인 술도가를 차렸다. 덕양 세동에 정착한 일본인 제1호였다. 이 술도가가 당시에 소라면과 인근 지역에 술을 공급하는 유일한 곳이었다. 술도가 주인은 일본 사람이지만 일본술 대신에 막걸리를 만들어 팔았다.

덕양에 술도가가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덕양이 소라면화양면 일대의 길목에 위치하고 있는 데다 술 수요가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 술도가에서는 정종이나 소주 등 다른 술은 만들지 않아 여수에서 사다 마셔야 했다. 소라면 사람들은 막걸리를 덕양에 소재하고 있는 쇼오도메만치 술도가에서 사서 지게에 져 나르든지 마을 가까운 주막집에서 사다 먹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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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오도메만치 술도가 자리

1937년 중일전쟁 이후 1945년 일본 패망까지는 전쟁 물자 확보를 위한 곡물 공출로 인하여 곡물이 무척 귀하게 되자 막걸리도 배급받게 되었다. 술도가 운영은 일본 주인이 직접 가게에 나오지 않고 한국인 종업원들이 일을 보았다고 한다. 이 일본인은 또한 소라면의 담배 하치장을 겸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공급이 달려서 술이나 담배 등은 언제나 없어서 못 파는 지경이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하게 되자 일본인들이 귀국하기 시작하였는데, 술도가 주인인 쇼오도메만치는 그 해 9월경 귀국하다가 조난당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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