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여수 지역의 독립운동은 주로 청년과 학생층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1919년 3·1운동 당시 여수 지역에서는 일부 면에서 산발적 시위는 있었으나 대규모 만세시위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그러나 3·1운동에 가담했던 재경 여수유학생들이 조직한 맞돕회를 비롯한 청년단체를 중심으로 항일의 기운이 유지되었는데, 이는 곧 태평양전쟁 후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진 1942년에 벌어진...
조선시대 전라남도 여수시 관문동에 있던 연못. 「영성도(營城圖)」에는 동문과 동문(東門) 좌포루(左鋪樓) 사이에 연못과 성곽 아래로 수구(水構)를 내어 천수(川水)로 흘러가는 것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 물길은 성곽을 따라 판 해자(垓字)와도 연결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호좌수영지(湖左水營誌)』의 기록에 의하면 1773년 3월 김영수가 물이 솟을 만한 곳을 가려 민가를 헐어서 연못...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여수 지역 청년들이 조직하였던 사회 운동 단체. 3·1운동 때에 서울에서 유학하던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학생들은 여수향우회를 만들어 활약하였다. 3·1운동의 후유증으로 학교에서 퇴학을 당하거나 자퇴하고 피신한 여수향우회 소속 학생들은 구심점을 잃고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중 여수 지역에 은신하고 있는 몇 사람들이 모여 서로 맞잡고 돕자는 뜻으로 맞돕회...
전라남도 여수시 관문동에 있던 옛 지명. 전라좌수영의 연못인 덕지(德池)가 있어서 유래된 지명이며, 덕지가 있던 동문 부근이 언덕형의 등성이를 이루고 있어 연못이 있는 등성이의 뜻으로 못등으로 부르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좌수영성을 허물게 되자 여수청년회 회원들이 이 연못을 사들여서 매립을 하여 여수청년회관이 만들어졌다. 이곳에서 여수청년회 활동인 맞돕회가 결성되어 활동하였으며,...
전라남도 여수시 관문동에 있는 일제강점기 지역 청년운동의 본거지. 여수시 관문동 여수경찰서와 여수엑스포역을 잇는 대로변 우리은행 여수지점(구, 한일은행) 뒤에 있다. 은행 뒤쪽 소로를 끼고 자리를 잡고 있다. 전라좌수영성에 ‘덕지’ 혹은 ‘못물동’이라고 부르는 400평~500평 가량의 연못이 있었다. 1930년 이 연못을 메우고 좌수영 밑에 있던 좌청[일명 취방청-당시 우체국으로...
1910년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될 때까지의 전라남도 여수의 역사. 1895년 전라좌수영이 폐지되고, 1896년 도서 지방에 돌산군이 신설되고, 1897년 육지 지역에 여수군이 신설됨으로써 순천도호부에서 분리 독립되어 여수·율촌·삼일·소라의 4개 면을 관할하였다. 후에 여수면이 현내면과 쌍봉면으로 분리되는 등 7개 면으로 분할되었다. 1914면 돌산군이 폐지되었고,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