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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00431
한자 曲華牧場分界城
영어의미역 Palisade of Gokhwa Stock Farm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소호동|오천동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장여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성곽|목장성
건립시기/연도 1445년(세종 10)연표보기
관련인물 조정(趙玎)
소재지 주소 전라남도 여수시 소호동~오천동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 소호동 해안부터 오천동 해안까지 이어지는 조선시대 목장성.

[건립경위]

곡화목장의 원래 이름은 백야곶목장으로, 설치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451년(세종 16) 12월 병조에서 아뢰기를, “전라도 백야곶 목장의 호랑이와 표범을, 순천 부사와 조양진 첨절제사 및 각 포(浦)의 만호로 하여금 군인을 요량하여 거느리고 잡되, 그 중에 먼저 창질을 하거나 먼저 쏘아서 잡은 자가 있거든 마리 수를 계산하여 벼슬을 주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전라도 지역에 목장이 집중적으로 세워지던 1445년(세종 10)에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곡화목장 분계성은 만리성이라고도 하는데, 성을 쌓았던 사람들이 썼다고 하는 흥양, 보성 등의 글자가 성 돌에 새겨져 있어 여러 고을 사람들이 동원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위치]

곡화목장은 지금의 소호동 해안부터 오천동 해안까지 이어지며, 이곳에 돌로 곡화목장 분계성을 만들고 말을 놓아길렀다.

[현황]

조선 중기에 이르러 곡화목장으로 이름을 바꾼 이 목장은, 당시 1,027필의 말이 수용되어 있었으며, 목자는 446명이었다. 철따라 목장을 이동, 봄에는 통구미산, 여름에는 이영산, 가을에는 천마산, 겨울에는 서이산에서 군마를 길렀다 하며, 밤이면 말이 도망치지 못하게 이웃 장수 마을 사이 1㎞ 산등성이에 등불을 켰다고 한다.

곡화목 감목관(監牧官) 가운데 조정(趙玎)은 목동을 거느리고 부산포 싸움에 자원 출전하여 적병을 다수 사살하였을 뿐 아니라 적의 군수물을 다량 노획함으로써 이순신이 그의 전공을 높이 평가하였다. 화동마을에는 목관 선정비 5기가 있는데 3기는 세워진 비이며 2기는 고인돌 위에 기록한 것이다. 그 중 1기에는 3명, 다른 1기에는 2명 등 전체 8명의 목관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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