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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국사 대웅전 후불탱」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01780
한자 興國寺大雄殿後佛幀
영어의미역 Background Hanging Paintings of Daeungjeon Hall in Heungguksa Temple
이칭/별칭 흥국사 대웅전 후불탱화,대웅전 영산회상도
분야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물/서화류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중흥동 17[흥국사길 160]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최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불교회화|탱화
제작시기/일시 1693년연표보기
작가 천신|의천
서체/기법 마 바탕에 채색
소장처 흥국사 지도보기
소장처 주소 전라남도 여수시 중흥동 17[흥국사길 160]
소유자 흥국사
문화재 지정번호 보물 제578호
문화재 지정일 1974년 7월 9일연표보기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 흥국사 대웅전에 봉안된 조선 후기 영산회상도.

[개설]

후불탱화(後佛幀畵)는 대웅전(大雄殿), 영산전(靈山殿), 팔상전(八相殿), 응진전(應眞殿) 등의 주존(主尊)인 석가불상의 뒷벽에 봉안하는 불화이다. 「흥국사 대웅전 후불탱」은 석가여래가 인도에서 영지 법회를 주재할 당시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법화경』의 내용을 도설화한 불화로 이를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라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법화경 신앙이 유행하면서 영산회상도가 많이 그려졌다. 「흥국사 대웅전 후불탱」의 화기란(畵記欄)을 보면 1693년 4월 영산회를 조성하여 봉안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주상전하(主上殿下)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고 아울러 50여 명의 비구와 일반 신도의 시주로 이루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불화를 그린 화공(畵工)은 의천(義天), 천신(天信)이다. 그린 후에 이 불화를 증명(證明)한 승려의 기록이 나타난다. 조선시대 숙종 대에서 정조 대에 걸쳐 활발한 법당의 재건이 이루어지면서 불상과 불화의 조성도 동시에 가져왔다. 법당이 재건됨으로써 법당 내부에 봉안할 불상의 조성과 불화의 제작이 뒤따른 것이다.

이 시기 조선전기에 그려지던 벽화에서 이동 가능한 불화로 대치되었다. 다량의 불화가 제작됨에 따라 불화를 전문적으로 그리는 화사집단(畵師集團)이 생겨나게 된다.

[형태 및 구성]

불화가 보물로 지정된 것은 흔치 않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한 부처가 연꽃좌대에 앉아 법화경을 설법하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 위에 범천과 제석천이 위치하고 있다. 화면 하단에는 사천왕이 전방에서 호위하고 있다. 신광 좌우에는 6대제자를 두고, 두광 좌우에는 여섯분의 분신불이 도열하고 있다. 최상단에는 용왕과 용녀 그리고 팔부신중상(八部神衆)이 배치되어 있다. 설법모임에 운집하여 법을 청해 듣고 있는 장엄한 광경이다. 화면 윗부분에는 정교하고 화려하게 수놓아진다라니(多羅尼) 주머니를 매달아 치례장식을 했다.

몸 주위 키형 광배의 신광에서는 오색찬란한 빛이 뻗어나가고 있다.

머리는 나발로 두정에는 산처럼 뾰족한 육계가 표현되었다. 머리에는 반구형의 중간계주, 육계 위에는 작은 구형의 정상계주를 표현하였다. 정상계주에서는 검은색 서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얼굴은 넙적한 방형이나 턱선은 부드러운 모습이다. 머리와 이마의 경계선인 발제선의 중앙에는 W자형의 라인이 표현된 특이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마는 넓으며 호형의 작은 눈썹 사이에는 백호가 표현되었다. 눈동자가 표현되었으며 눈꼬리가 약간 올라간 반개한 눈으로 코는 콧등과 콧방울이 작아 이지적인 모습이다. 입술도 매우 작게 표현되고 콧수염과 턱수염이 짧고 가늘게 표현되었다. 귀는 목 중간까지 내려와 있으며 귓불이 약간 외반되었다. 큰 얼굴에 비하여 이목구비는 작게 표현된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굵은 목과 살집이 넉넉한 어깨로 표현되어 건장하고 당당한 모습이다. 법의는 우견편단으로 금빛의 둥근 보상화문을 시문한 붉은 가사를 걸치고 있다. 대의는 밤색으로 단을 마무리하여 정중한 자태이다. 승각기는 수평으로 걸치고 대의에 표현된 채색은 붉은색이 주조를 이루며 녹색과 밤색이 어우러졌다. 꽃무늬나 옷 주름선 등에 금색을 사용하고 있어서 한결 고상하고 품위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불화의 구도는 본존불을 중심으로 하단부에는 4천왕(天王)과 4대 보살을 모셨다. 상단부에는 제석(帝釋), 범천(梵天), 6제자, 6여래와 용왕(龍王), 용녀(龍女) 및 6위의 신장상(神將像) 등을 배치하고 있다. 4보살상은 정중동(靜中動)의 자세와 두광과 천의에서 색상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미륵과 제화갈라보살의 상단 후열의 대각선상에 보살형인 대범천과 제석천이 배치되었다. 대범천과 제석천은 녹색의 두광이 표현되었으며, 대범천은 녹색 제석천은 붉은색 천의를 걸쳤다.

마(麻) 바탕에 채색한 가로 4.27m 세로 5.07m인 대족자로 되어 있다.

화면 상단에는 흑색으로 처리하여 무한한 천공(天空)을 표현하고 있다. 불화의 밑에는 화기가 적혀 있다. 화기는 ‘강희삼십이년계유4월일 영취산흥국사영산회필 공안우태위주상삼전하만세수만세국태민안 법륜상전(康熙三十二年癸酉四月日 靈鷲山興國寺靈山會畢 功安于泰爲主上三殿下萬歲壽萬歲國泰民安 法輪常轉)이라고 묵서되어 있다.

[특징]

대부분의 후불화는 종군적(縱群的) 구도를 지니고 있는 것과는 달리 횡군적(橫群的) 구도를 이루고 있다. 등장인물 모두가 안정된 대칭 구도이다. 채색은 대체로 붉은색과 녹색으로 이루어졌다. 머리광배의 녹색은 지나치게 광택이 있어 은은하고 밝은 맛이 적다.

이 불화는 가로가 세로보다 80㎝나 더 넓은 가로 구도라는 것이 특징이다. 본존불(本尊佛)이 화면에 비해서 작아지고 보살 등 협시들이 상대적으로 커졌기 때문에 협시의 수는 별로 많아지지 않았다. 팔부중과 분신불은 두 분씩 늘고, 4보살, 6제자 등은 동일하다.

본존불은 정묘한 파기형광배(簸箕形光背)를 배경으로 결가부좌하였다. 뾰족한 육계나 계주, 구슬처럼 표현한 나발이 특징이다. 둥글고 풍만한 얼굴, 작고 부드러운 눈, 귀, 코, 입과 이마의 특이한 머리칼이 특징이다. 다소 경직되어 원만한 면에서는 약간 떨어진다. 보살이나 기타 협시들에게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사천왕은 전체적인 모습을 보면 남방증장천왕과 북방다문천왕은 내부를 수호하고 동방지국천왕과 서방광목천왕은 외부를 경계하고 있다. 대칭적 수호가 아니라 X자형으로 교차적 수호를 하고 있는 것이다. 대칭적 자세에서 보이는 경직되고 정적인 모습에서, 자유롭고 동적이며 자유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흥국사대웅전후불탱의 백미는 바로 이 사천왕의 자세의 배치에 있다.

이처럼 자유스럽고 부드러우며 역동적인 배치를 한 불화는 천신스님이 1681년에 조성한 하동 쌍계사팔상전영산회상도에 처음 등장한다. 이 불화는 시험작이라 경직된 모습이다. 1693년에 조성된 흥국사대웅전후불탱에는 완숙한 솜씨가 드러나고 있다. 왕실의 발원에 의하여 1707년에 조성된 파계사영산회상도에도 이런 모습이 보이나 보살상들이 경직된 모습이다.

불화(佛畵)로서는 드물게 보물로 지정된 「흥국사 대웅전 후불탱」은 임진왜란 이후의 불화에서 나타나는 특징처럼 석가여래를 한복판에 크게 배치하였다. 주제를 뚜렷이 살리고자 큰 인물은 자세히, 작은 인물은 약간씩 원근법을 사용하였다. 끝이 없는 천공을 흑색으로 짙게 처리하고 있다. 이 불화의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바로 색채면(色彩面)이다.

색채는 붉은색인 경우 약간 탁한 연홍이고 머리광배의 녹색이 지나치게 광택이 나는 녹청색이어서 색이 튀는 경향이 있다. 은은하고 밝은 맛이 줄어드는 것 같다. 꽃무늬나 옷 주름선 등이 고상하고 금선이나 금채를 구사하고 있다. 한결 고상하고 품위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는 것은 이 불화의 우수성을 더해주는 요체이다.

[의의와 평가]

대체로 조선시대 영산회상도의 일반적 배열인 군도형식을 취하고 있다. 본존을 중심으로 허다한 인물들이 배치되기 때문에 군도형식은 좌우대칭적으로 배치하게 된다. 질서는 있으나, 경직되고 답답한 느낌을 가지게 된다. 흥국사대웅전후불탱은 각 인물의 표정과 동작, 의상의 색채와 문양을 변화 있게 표현함으로써 자연스럽고 역동적이며 조화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광배도 투명 광배를 배치하여 획일적 광배에 변화를 준다. 보살상과 사천왕의 시선을 다양하게 함으로써 군도형식의 중앙집중형 대칭구도의 경직성에서 탈피하고 있다.

‘화기’에 의하면 이 불화를 조성할 때 서민층도 많이 참가한 것으로 보아 불교의 대중화를 짐작할 수 있다. 작품성에 있어서는 원만한 형태와 고상한 색채의 조화로 17세기 후반기를 대표할 만한 뛰어난 걸작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 회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