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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01787
한자 興國寺佛敎經板一括
영어의미역 Classical Books and Records of Heungguksa Temple
분야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물/유물(일반)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중흥동 17[흥국사길 160] 흥국사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진옥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불교경판
제작시기/일시 조선 중기
제작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재질 목재
높이 14종 391판
소장처 의승수군유물전시관 지도보기
소장처 주소 전라남도 여수시 중흥동 17[흥국사길 160] 흥국사
소유자 흥국사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 흥국사에 있는 조선 중기 불교 경전 및 의식문 등을 다량으로 인쇄하기 위해 제작된 목재 경판 일체.

[개설]

불교는 삼국시대에 처음 들어온 이래 설법과 간경(刊經)으로 전파되었다. 설법은 승려가 직접 불법을 강설하는 것이며, 간경은 불법의 가르침을 책으로 간행하는 것이다. 초기의 간경은 사람이 직접 붓으로 썼다. 짧게는 수십자에서 길게는 수십만자의 불경을 일일이 사람의 손으로 쓴다는 것은 신앙심을 떠나 포교 방법으로서 비효율적이었다. 이의 해결책으로 등장한 것이 목판에 경전을 새겨 종이에 대량으로 찍어내는 기법인 목판인쇄술이다.

현재 세계 최고(最古)의 인쇄물로 공인된 것은 8세기 중엽 신라에서 제작된 국보 제126호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다. 이 시기를 전후해서 신라 말기부터 우리나라의 인쇄술은 사찰을 중심으로 눈에 띄게 발달하였다. 이후 불교가 고려의 국가적인 종교로 성장하면서 인쇄술은 양적·질적으로 크게 성장하였다.

사찰판본을 조성한 1차적인 동기는 불전에 대한 공양에 있었다. 부처의 가르침이 담긴 경전을 주위에 보급하는 일, 곧 법포시(法布施)의 공덕은 경전 곳곳에서 강조되었다. 고려의 귀족들은 간경 불사에 앞을 다투어 동참하였다. 간경 불사는 다시 주위에 널리 보급됨으로써 사찰과 귀족 모두의 목적을 충족시켜주었다. 그러나 잦은 전란으로 인해 판본은 대부분 소실되었으며, 탑이나 불상의 몸통 안에 봉안된 일부 판본만이 전한다. 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1007년(고려 목종 10) 개성 총지사(摠持寺)에서 간행된 『일체여래심비밀전신사리보협인다라니경( 一切如來心秘密全身舍利寶篋印陀羅尼經)』이다.

억불숭유를 이념으로 한 조선시대에도 불서의 간행은 여전히 활발하였다. 그러나 불교경판은 대부분 고려시대의 목판을 그대로 재현한 복각이거나 다소 변형시킨 번각(飜刻)이었다. 다만, 국왕이나 왕실 혹은 권문세가가 시주가 되어 간행한 불교경판은 독자적으로 판하본(板下本)을 제작하여 조각한 것이었다.

당시 규모가 있는 사찰은 각수(刻手)와 지공(紙工) 등의 인력이 풍부하였다. 신라시대 이래 축적된 인쇄술과 함께 이에 필요한 먹·종이·목판 등의 기자재가 주변에 항상 준비되어 있었다. 목판 인쇄를 위한 제반 여건이 고루 갖춰져 있었다. 목판 인쇄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불법을 보시한다는 신앙적 목적에서 새김에서부터 장정까지 전과정에 혼신을 다하였다.

그 결과, 사찰판본은 관(官)·사가(私家)·서원 등에도 많은 영향을 끼치면서 한국 인쇄문화 발달에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조선시대 사찰본 가운데 연대와 장소를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상당하다.

문화재청에서는 2002년부터 2013년까지 12년간 진행한 ‘전국 사찰 문화재 일제조사’의 보고서를 발간하였다. 이 사업을 통해 전국 3417개 사찰이 소장한 16만 3367점의 문화재에 대한 현황조사와 목록화를 완료했다. 이 가운데 108건의 불교문화재를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했다.

이후 ‘2015년도 전국 사찰 목판 일제조사 사업’을 수행하고 성과를 담은 보고서 「한국의 사찰문화재–2015년 전국 사찰 목판 일제조사」를 발간하였다.

2015년 시행한 울산광역시, 경상남도(밀양‧함양‧합천) 소재 6개 사찰 소장 목판 5,505점에 대한 조사자료와 순천 송광사, 구례 화엄사, 해남 대흥사에 소장된 중요 목판 21종 615판(총 4,401장)에 대한 인출(印出, 목판 등에 새겨진 글씨 등을 찍어냄)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 조사를 통해 27점의 목판이 새롭게 확인되었다. 목판의 마구리 결손 등의 이유로 다른 목판으로 파악되었던 오류를 수정하는 등 총 14종 1,070점의 정보를 바로잡았다. 아울러 충해(蟲害) 등으로 손상된 목판의 경우 별도의 공간에 격리 수납조치 시키는 등 목판 보존관리 대책도 마련하였다.

여수 흥국사는 2017년 수장고를 신축하였다. 현재는 그동안 의승수군유물전시관에 보관중이던 목판및 비·전시 유물은 수장고로 이관하여 보관하고 있다.

[형태]

흥국사에 소장되어 있는 불교경판은 모두 14종 총 391판이다. 그 밖의 불교경판은 거듭된 전란과 화재로 대부분 소실되거나 유실된 것으로 보인다. 이 불교경판은 불전에 대한 공양을 목적으로 제작되었을 것이며, 이로부터 인출된 경전이나 책자는 법보시·의범·교재 등의 용도로 쓰였을 것이다.

14종의 불교경판은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청문(請文)』·『치문경훈(緇門警訓)』·『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예수십왕생재의찬요(預修十王生齋儀纂要)』·『소청사자소(召請使者疏)』·『예수천왕통의(預修薦王通儀)』·『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天地冥陽水陸齋儀纂要)』·『수륙무차평등재의촬요(水陸無遮平等齋儀撮要)』·『천지명양수륙재의소문첩절요(天地冥陽水陸齋儀疏文牒節要)』·『전라남도순천부영취산흥국사사적(全羅南道順天府靈鷲山興國寺事蹟)』·『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천자문(千字文)』·『유합(類合)』 등이 있다.

1.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 경판

일반적으로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라고 부른다.

이 경판은 구마라집(鳩摩羅什)이 한역(漢譯)한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에 중국의 불교 대가 5인의 주해(註解)를 덧붙인 『금강반야바라밀경오가해』를 목판에 새긴 것이다. 24.6×39.0㎝의 유계(有界)에 2쪽씩 새겨져 있다. 각각 9행 19자의 내용이 담겨 있다. 간기(刊記)에 ‘강희사년청사고종월송주화인...근서전라도순천지영취산흥국사개간(康熙四年靑蛇姑從月松禾後人…謹書全羅道順天地靈鷲山興國寺開刊)’이라고 적혀 있다. 현재 113판이 남아 있다. 1665년(강희 4) 전라남도 순천 흥국사에서 판각되어 현재 113판이 전한다.

흥국사 금강경오가 목판은 상권 2판, 하권 8판이 유실되어 현재 총 113판만 남았다. 목판은 전·후면에 각각 1장씩 판각하였다. 마구리는 판목의 장부가 관통된 형태로 결구하여 나무못으로 고정하였다. 목판의 전체 크기는 세로 25.3㎝, 가로 39.3㎝이다. 광곽은 사주단변이다. 광관의 크기는 세로 24.6㎝, 가로 39.3㎝이다. 반곽의 행자수는 대자 9행 14자, 중자 9행 19자이며 주쌍행이다. 판심부의 어미 형태는 대부분 상하내향이엽화문이며 판심제는 ‘금강경서’, ‘금강경상’, ‘금강경하’이다. 목판의 상권 126장과 하권 110장 말미에서 개판시기와 시주자 등의 간행 관련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상권의 권말에는 1665년 중간하면서 쓴 초서체의 후서가 있다. 이어서 ‘전라도순천지영취산흥국사간’의 간행기록을 통해 흥국사에서 판각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 외 하권의 권말의 여백에도 시주질을 열거하고 있다. 목판은 일부 판에서 미세한 글자 손상과 균열 등이 확인되지만 전체적인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2.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권1 경판(1)

이 경판은 구마라집이 한역한 『묘법연화경』을 목판에 새긴 것이다. 전체 크기는 21.3×44.8㎝의 크기에 2쪽씩 새겨져 있다. 각각 8행 13자의 내용이 담겨 있다. 현재 20판이 남아 있다.

『묘법연화경』은 줄여서 『법화경』으로 불리며, 『화엄경(華嚴經)』과 함께 한국 불교사의 쌍벽을 이루는 주요 경전이다. 모든 경전 중의 경전인 동시에, 초기 대승경전(大乘經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불경으로 알려져 있다.

『묘법연화경』은 모두 20품(品)으로 구성되어 있다. 품이란 지금의 장(章)에 해당된다.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제25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을 관음신앙의 근거로 삼아 중시하는 동시에 이를 『관음경(觀音經)』으로 따로 묶어 애송한다. 이 밖에 대표적인 것으로는 불탑숭배사상이 담겨 있어 우리나라 다보탑과 석가탑 조성의 바탕이 된 제11 「견보탑품(見寶塔品)」, 전통적 시각 너머 보살의 지위를 크게 부각하고 있는 제15 「종지용출품(從地涌出品)」, 온 생명의 바탕이 곧 부처라는 보살들의 새로운 불타관(佛陀觀)이 반영된 제16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 등이 있다.

『법화경』의 핵심 사상은 삼승(三乘)은 결국 일승(一乘)으로 돌아간다는 ‘회삼귀일(會三歸一)’이다. 세상에 출현한 부처가 성문(聲聞)·연각(緣覺)·보살 등에게 각기 적절한 법을 설하지만, 이는 일시적인 방편일 뿐 세상에는 오직 부처의 법만이 있어 누구든 이를 따르면 바로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법화경』20품 가운데 그 사상이 잘 드러나 있는 것은 제2 「방편품(方便品)」, 제3 「비유품(臂喩品)」, 제4 「신해품(信解品)」, 제5 「약초유품(藥草喩品)」, 제7 「화성유품(化城喩品)」 등이다. 화택(火宅)의 비유, 탕자(蕩子)의 비유, 약초의 비유, 주정뱅이의 비유 등은 특히 유명하다.

흥국사 소장 『묘법연화경』목판은 대자본 계열의 복각판으로 권1부분이다. 모두 전·후면에 각각 1장씩 판각하여 총 20판에 40장이 새겨져 있다.

목판은 가로로 긴 장방형의 형태에 마구리는 장부가 노출된 형태로 결구하였다. 일부 마구리가 결손된 판도 있다. 광곽은 사주단변의 무게이고 광곽의 크기는 가로 21.7㎝, 세로 33.5㎝이다. 판심부의 어미 형태는 대체로 상하내향이엽화문이지만 일엽·삼엽 및 흑어미가 혼재되어 나타나기도 하며 판심제는 ‘법일’로 동일하다.

목판의 상태는 균열이 보이는 판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향호하며 마구리가 결손되거나 흔들리는 판이 있어 보완이 필요하다.

3.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권1 경판(2)

흥국사 목판본은 대자본 계열의 복각판으로 권1의 마지막 장1판이 전한다.

목판은 가로로 긴 장방형의 형태로 전면에 마지막 51장이 판각되었다. 후면은 판각되어 있지 않다. 마구리는 별도로 제작하지 않았으며 전체 크기는 최대 세로 21.8㎝, 가로 33.7㎝이다. 반엽에 행자수는 8행 13자이며 판심부의 어미는 상하내향삼엽화문의 형태이다. 판심제는 ‘법화경권일(法華經卷一)’이다. 간행기록이 없어 판각처 및 판각 시기는 확인이 어렵다. 목판의 상태는 대체로 양호한 편이지만 일부 글자가 훼손된 부분이 확인된다.

4.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 경판

이 경판은 『초발심자경문』을 목판에 새긴 것이다. 19.0×32.2㎝의 유계에 2쪽씩 새겨져 있다. 각각 8행 17자의 내용이 담겨 있다. 현재 8판이 남아 있다. 제7장 후 면 간기에 ‘강희사십칠년무자순천영취산흥국사신개간판(康熙四十七年戊子順天靈鷲山興國寺新開刊板)’이라고 적혀 있다. 목판이 1708년 흥국사에서 판각되었으며 ‘初心行實文開刊’이라하여 본 목판이 초심자들이 경계해야 할 행실에 대한 내용임을 밝혔다.

『초발심자경문』은 고려 보조국사 지눌의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 신라 원효의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 고려 말 야운선사의 『자경문(自警文)』을 합본한 책이다. 대개 처음 출가한 사미승이 절 안에서 지켜야 할 마음자세와 몸가짐을 익히는 기본서로 사용되었다. 『계초심학인문』은 올바른 행의(行義)에 관한 내용이고, 『발심수행장』은 불법에 대한 믿음을 일으키는 마음가짐에 관한 내용이며, 『자경문』은 수행인으로서 자신을 일깨우고 경계하는 내용이다.

흥국사의 『초발심자경문』목판은 현재 8장과 9장이 유실되어 총 8판이 전해진다. 후면에 각 1장씩 판각되어 1판에 2장씩 새겨졌다. 마지막 16장의 후면은 판각되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4장이 ‘계초심학인문“이다. 5-7장은 ”발심수행장 8-16장까지는 “자경서”를 수록하였다. 마구리는 따로 제작하여 판면의 장부가 보이도록 결구하고 못으로 고정하였다. 목판의 크기는 조금씩 차이가 있다. 광곽은 사주단변에 무계이며 세로 18.3㎝, 가로 28.7㎝이다. 반곽의 행자수는 8행 17자로 동일하게 새겼다. 판심부의 어미는 상하내향이엽화문의 형태이고 판심제는 각 저술별로 ‘初’, ‘章’, ‘自’의 순으로 이어진다.

목판의 대부분의 마구리가 결손되어 있다. 남아있는 마구리도 부실하게 고정되어 있다. 일부 판에서 곰팡이가 확인되고 광곽의 변란 및 글자가 손상된 판도 있어 보수가 필요하다.

5. 『치문경훈(緇門警訓)』

이 경판은 출가 승려들의 수행에 도움이 될 만한 고승들의 글을 모아 놓은 『치문(緇門)』을 목판에 새긴 것이다. 목판의 전체 크기는 세로 18.5㎝, 가로 29.5㎝이다. 유계에 2쪽씩 새겨져 있으며, 각각 11행 20자의 내용이 담겨 있다. 간기에 ‘강희삼년갑진삼월일전라도순천흥국사개판(康熙三年甲辰三月日全羅道順天興國寺開板)’이라고 적혀 있다. 이에 따르면 1664년 4월 흥국사에서 개판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76판이 남아 있다.

『치문경훈』은 불가의 승려들이 수행하는데 교훈을 삼을 만한 역대 고승들의 교, 선, 율, 전기 등의 각 방면에서 초발심자들에게 필요한 글들을 모아 편집하였다. 승려들의 수행에 관한 기본요건인 계·정·혜를 중심으로 깨달음을 추구하고 있는 글들을 수록하고 있다. 특히 계율 및 수행자들의 위의와 행동지침에 관한 글들이 상당히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조선후기 강원서 승려의 규율을 가르치는 입문서로 채택되었다.

『치문』의 ‘치(緇)’는 출가 승려들이 입는 검은 색 가사에 빗대어 승려나 불교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치문』은 중국 원(元)나라의 지현(智賢)이 처음으로 편찬하였으며, 명(明)나라의 여근이 개편하였다. 내용은 중국의 승려와 거사(居士) 등이 쓴 권학(勸學)이나 경책(警責)의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치문』은 고려 말 고승 보우(普愚)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들여온 후 수차례의 편찬 과정을 거쳐 승려들의 교재로 사용되었다. 『치문』 경판은 흥국사판 외에 1539년(중종 34) 금강산 표훈사(表訓寺)판·1588년(선조 21) 호거산(虎踞山) 운문사(雲門寺)판·1664년(현종 5)과 1695년(숙종 21) 지리산 쌍계사판(雙磎寺板) 등이 남아 있다.

쌍계사판은 성총(性聰)이 어려운 단어와 용어를 해석하고 주를 붙여 편찬한 것으로 『치문경훈속집(緇門警訓續集)』·『치문집주(緇門集註)』·『치문집설(緇門集說)』로도 불린다. 조선 후기 태선(太先)이 성총의 이 책에서 부족한 부분을 보충한 『치문사기(緇門私記)』도 있다. 찬자는 명나라의 여근이다.

흥국사 소장 『치문경훈』은 서문 1판, 상권41판, 하권25판, 속집 9판까지 전체 76판이 남아 있다. 상권 1판(63-64장)과 하권 13판(3-10장, 39-56장)은 유실된 상태이다.

전·후면에 각 1장씩 총 2장이 판각되어 있다. 광곽은 사주단변에 무계이다. 광곽의 크기는 세로 18.0㎝, 가로 30.0㎝이다. 반곽의 행자수는 11행 20자이다. 판심부의 어미는 없으며 판심제는 서문, 상·하권, 속편에 따라 ‘서(序)’, ‘치(緇)’, ‘속(續)’으로 구분하였다. 대부분의 목판은 좌·우 변란 밖으로 시주에 참여한 승려·시주자의 인명이 판각되어 있다.

흥국사에 소장된 『치문경훈』은 상권 82장의 후면에 시주질과 간행기록이 남아 있어 판각과 관련된 사항을 확인할 수 있다. 목판은 일부 판에서 약간의 균열과 오염이 있지만 전체적인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상권의 (45,45)과 (63,64)판은 마구리의 결손이 확인되므로 보완이 필요하다.

6. 『수륙무차평등재의촬요(水陸無遮平等齋儀撮要)』 경판

이 경판은 『수륙무차평등재의촬요』을 목판에 새긴 것이다. 26.5×55.2㎝의 유계에 2쪽씩 새겨져 있다. 각각 7행 17자의 내용이 담겨 있다. 현재 24판이 남아 있다. 마지막 24장 간기에 ‘순치십칠년경자중춘일영취산흥국사개간(順治十七年庚子仲春日靈鷲山興國寺開刊)’이라고 적혀 있다. 1660년(순치 17) 여름 영취산 흥국사에서 개판하였다는 얘기다.

오늘날 전래되고 있는 수륙재의 의문(儀文)은 『범음집(梵音集)』 속의 수륙재의문인 「천지명양수륙재의문산보집(天地冥陽水陸齋儀文刪補集)」, 백파(白坡)의 『작법귀감(作法龜鑑)』에 수록된 수륙재의문, 『석문의범(釋門儀範)』 속의 수륙재의 등이 있다. 그 가운데 『석문의범』에 보이는 수륙재의 의식 절차는 앞의 세 가지와 많은 차이를 보이나 그 취지는 거의 일치한다.

수륙무차평등재의(水陸無遮平等齋儀)란 바로 이 『석문의범』에서 수륙재의를 따로 일컫는 말이다. 유주무주의 모든 영혼을 평등하게 천도하는 의례라는 뜻이다. 이를 간략하게 정리한 것이 『수륙무차평등재의촬요』이며, 편자는 미상이다. 이 재의문들에 공통적으로 있는 수륙재의 절차는 대략 다음과 같다.

먼저 재를 여는 취지를 밝히고 영혼이 불보살로부터 설법을 들을 수 있도록 보리심(菩提心)을 일으키게 한다. 이어서 명부사자를 맞이하기 위해 분향(焚香)한다. 그리고 명부사자를 초청하여 공양하고 축원한다. 재를 행하는 장소가 청정도량이 되도록 오방신(五方神)에게 공양하고 명부사자를 대접해 보낸다. 도량을 청정하게 한 다음 불법승 삼보(三寶)를 공양한다. 다음으로 호법제선신중(護法諸善神衆)인 천(天)·팔부신장(八部神將)·용왕 등을 청하여 공양한다. 다시 정법의 상징인 삼보를 도량에 청하여 공양하고 불단에 모신다.

이어서 천도의 대상인 망자의 영혼을 청하는데, 우선 불보살 앞에 나아가기 전에 조욕(藻浴)을 행한다. 먼저, 그 몸을 청결히 한 뒤 불법을 뜻하는 새 옷으로 갈아입는 절차를 행한 다음 불보살에게 공양을 올려 그 가피력으로 구제받는다. 그 다음, 그 고혼에게 공양을 대접하는데, 이때 음식은 모두 법식(法食)으로 변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참회와 사홍서원(四弘誓願)을 행한다. 이때 고혼은 바른 불제자가 되어 비로소 완전히 구제받는다.

흥국사 소장 『결수문』목판은 현재 『수륙무차평등재의촬요』19판과 『수륙무차평등소방문첩』5판이 묶여 모두 24판이 전해진다. 소장 장차로 보아 (13,14)판과 (27,28)판은 유실되었다. 목판은 한 면에 1장씩 모두 2장이 판각된 형태다. 마구리는 따로 제작하여 장부가 보이지 않게 결합하였다. 일부는 장부가 보이는 관통형도 있다. 광곽은 사주단변에 유계이며 수인의 설명은 주쌍행이다. 『수륙무차평등소방문첩절요』는 작은 글씨로 새겨 9행 20자이다. 판심부의 어미는 상하내향혼용어미의 형태에 판심제는 내용에 따라 ‘결’, ‘방’, ‘소’로 구분하고 있다. 목판은 일부 흙으로 오염된 부분이 보이며 일부 마구리가 결손된 판도 있다.

7. 『예수시왕생칠재의찬요(預修十王生七齋儀纂要)』 경판

이 경판은 죽어서 명부(冥府)에 가 심판받을 죄를 생전에 미리 49재로써 깨끗이 하는 의식 절차를 목판에 새긴 것이다. 20.0×46.4㎝의 유계(有界)에 2쪽씩 새겨져 있으며, 각각 8행 16자의 내용이 담겨 있다. 간기에 ‘강희사년을사오월일전라도흥국사간판(康熙四年乙巳五月日全羅道興國寺刊板)’이라고 적혀 있다. 1665년(강희 2) 흥국사에서 개판되었음을 확인하고 있다. 현재 26판이 남아 있다.

『예수시왕생칠재의찬요』는 상당히 번쇄하고 양도 많은 본래 의례문의 내용을 정리하여 간략하게 기술한 것이다. 조선시대의 승려 대우(大愚)가 집술(集述)하였다. 『예수천왕통의(預修薦王通儀)』와 함께 줄여서 『예수문(預修文)』으로도 불린다.

예수시왕생재는 줄여서 생전예수재 혹은 예수재라고 한다. ‘예수’란 미리 닦는다는 뜻이며, ‘시왕’은 사람이 죽어서 간다는 명부의 10대 왕을 말한다. ‘재’는 49재를 가리킨다. 곧, 예수시왕생재란 중생들이 아득한 과거는 물론, 나아가 금생 및 내생에 짓게 될 무수한 죄업을 소멸시키기 위해 생전에 봉행하는 49재를 이르는 말이다. 이는 불교의 독특한 윤회관과 죄악관을 엿볼 수 있는 사례다.

전체 과정은 사람이 죽었을 때 지내는 49재와 별반 다르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모든 인간은 명부에 이르러 갚아야 할 돈, 곧 흠전량(欠錢量: 부족한 돈의 양)과 독송해야 할 경전이 있으며, 이것을 현생에서 미리 행하여 마친다는 점이다. 이는 예수재 의식을 통해 그 돈을 명부 시왕전에 봉헌하여 갚고 또한 경전을 읽어 바침으로써 가능해진다.

예수시왕생재의 경전적 근거는 『불설예수시왕칠생경(佛說預修十王七生經)』·『지장보살본원경』·『불설예수시왕생칠경』·『불설수생경』·『불설관정수원왕생시방정토경』 등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불설관정수원왕생시방정토경(佛說灌頂隨願往生十方淨土經)』에 있는 다음의 내용에 의한다.

부처님께서 구시나가라국 사라쌍수 사이에서 열반에 드시고자 할 때 그곳에 모인 대중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의심이 있는 자는 마땅히 물으라. 내 멸도(滅度)하기 전 다소 의혹되는 바가 있거든 그대들을 위해 그 의혹을 끝까지 풀어 주리라.” 이때 타방국토(他方國土)의 보광보살(普廣菩薩)이 “네 무리의 제자가 임종(臨終)할 때이거나 이미 임종한 이를 위해 어떤 공덕을 닦아야 시방국토(十方國土)에 왕생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 또다시 보광보살의 입을 빌어 말씀하시기를, “저 시방 부처님 세계에 태어나기를 희망한다면, 임종을 당하거나 임종을 당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향을 사르고 등불을 켜고 탑사(塔寺)의 표찰(表刹: 당간) 중에 번(幡: 깃발)을 세우고 3·7일(21일)동안 부처님 경(經)을 외울 것 같으면, 목숨이 끊어져 중음(中陰) 중에 있어 그 몸이 마치 어린 아이와 같아 죄와 복이 결정되지 못할 때 그때에 응당 복 닦음이 되어지리니, 그때 망자(亡者)의 몸이 시방의 무량찰토(無量刹土)에 나기를 원하면, 그와 같이 될 것이다. 이에 이미 죽은 사람을 위해 이런 복업을 짓게 하면 죄업의 때를 소멸할 수 있으리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의 부모·형제·친족이 삼도팔난(三途八難)에 떨어져 갖은 고통을 받고 있을 때 부모·형제와 친족이 그를 위해 복을 닦아줄 수 있는 바, 죽은 사람의 유산 등을 삼보(三寶)께 보시함으로써 삼도팔난 중의 사람은 친족이 닦은 복의 7분의 1을 얻을 수 있다. 또한 4배(四輩: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의 무리가 법과 계(戒)를 잘 이해하고 생명이 마칠 때 3·7일을 역수(逆修), 곧, 예수(豫修)하면 그 복이 무량할 것이다”고 하셨다.

흥국사의 『예수시왕생칠재의찬요』는 총 26판에 51장이 전해진다. 목판은 대부분 각 면에 1장씩 새겨져 하나의 목판에 총 2장씩 판각되었다. 좌·우 변란 밖에는 시주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마구리는 따로 제작하여 판면의 장부가 보이게 결구하였다. 마구리의 측면에는 경명과 장차가 묵서로 쓰여있다. “예수문”은 행자수가 8행 16자이다. “예수천왕통의” 등의 의식문은 11행 19자이다. 판심부의 어미는 상하내향에 흑어미와 화문어미가 혼재되어 있다. 판심제는 “예수통”, “예수문”, “예수소”, “함”등으로 구분하여 새겨져 있다.

목판 상태는 전반적으로 양호한 편이나 다수의 목판에서 판면의 본문까지 균열이 있어 보수가 필요하다.

8. 『제반문(諸般文)』 경판

수정 전의 디지털여수문화대전에서는 『청문』이라고 기록하였다.

이 경판은 사찰의 각종 의식에서 불보살이나 망자를 청하기 위해 송주(誦呪)하는 일체의 언구를 모아 놓은 청문을 목판에 새긴 것이다. 21.9×48.8㎝의 유계에 2쪽씩 새겨져 있다. 각각 8행 15자의 내용이 담겨 있다. 마지막장 간기에 ‘강희삼년갑진삼월일전라좌도순천지영취산흥국사개판(康熙三年甲辰三月日全羅左道順天地靈鷲山興國寺開板)’이라고 적혀 있다. 1664년(강희 3) 5월 흥국사에서 개판되었음을 알수 있다. 현재 50판이 남아 있다.

주요 내용은 상단(上壇)과 신중단(神衆壇) 앞에서 행해지는 각종 의식용 진언이다. 대웅전에서의 예불·사시마지·공양 등의 의례 등도 포함한다. 극락전·미륵전·약사전·관음전·지장전·나한전·독성각·칠성각·산신각 등 사찰의 각 전(殿)에서 행하는 진언 의례도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편자는 미상이다.

진언은 원래 오종불번(五種不飜)이라 하여 인도 고대어 발음 그대로 표기한다. 그 의미를 제대로 알기가 쉽지 않은데, 대부분 찬탄·축원·예배·희구 등의 어구가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각 의식의 정당성과 유효성을 담보하기 위해 신불(神佛) 등이 그 현장에 몸을 나투어 주기를 청하는 목적을 갖는다. 끝부분은 대개 신불을 청하는 말과 노래인 가영(歌詠)으로 이루어진다. 한국 불교, 특히 그 의례의 성립에 밀교가 기여한 정도를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사례이다.

흥국사의 『제반문』목판은 각종 의식문의 내용인 1-111 장과시주자의 기록인 종장을 더해 총 60판에 97장이 남아 있다. 일부 결손판이 있다.

목판은 판면에 각각 1장씩 총 2장을 새겼으며 장차의 순서는 혼재되어 있고 일부 판은 후면을 판각하지 않았다. 이외에도(48, x)판의 후면에는 판면의 내용이 지워져 있는데 판간의 오류에 의한 수정인지 후대에 인위적인 훼손인지 확인이 어렵다. 마구리는 장부가 보이게 결구하였으며 일부는 마구리가 결손되었다.

판심부의 어미는 각 판마다 여러 형태의 어미가 섞여있으며 판심제는 ‘청문’과 ‘문’이다. 일부 판에는 전판사, 탁주비구 등 판각에 참여한 승려의 이름이 확인된다. 시주질 말미에 ‘삼십삼年갑술윤오월일落판개’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일부 결손된 판을 다시 판각한 것으로 추정된다. 1664년 판각본과 1694년 보수판이 혼재되어 차후 정밀한 조사가 요구된다.

9. 『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天地冥陽水陸齋儀纂要)』 경판

이 경판은 『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天地冥陽水陸齋儀纂要)』를 목판에 새긴 것이다. 27.2×56.3㎝의 유계에 2쪽씩 새겨져 있다. 각각 7행 17자의 내용이 담겨 있다. 현재 29판이 남아 있다. 마지막 65장의 간기에 ‘순치십칠년경자중춘일영취산흥국사개간(順治十七年庚子仲春日靈鷲山興國寺開刊)’이라고 적혀 있다. 1660년(순치 17)음력 2월에 영취산 흥국사에서 개판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는 수륙재 때 행하는 여러 의식 절차를 정리한 것으로 고려의 승려 죽암(竹庵)이 편찬하였다. 수륙재 역시 과거·미래·현재의 죄업을 현생에 미리 닦는 예수재의 일종으로 그 내용은 예수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가 『예수문』으로 불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수륙재의 시초는 중국이다. 양(梁)나라 무제(武帝)의 명에 의해 지공(誌公)이 『수륙의문(水陸儀文)』을 만들어 금산사(金山寺)에서 행한 것이 처음이다. 한국에서는 970년(고려 광종 21) 수원 갈양사(葛陽寺)에서 혜거(惠居)가 처음으로 시행한 이래, 고려시대에 특히 성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억불정책으로 인해 중종 때(1515)까지 국가 행사로 시행되다가 결국 유생들의 반대로 폐지되었다. 이후 민간에 의해 명맥을 유지하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흥국사 소장『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목판은 현재 총 29판이 전한다. 이중 (19,20) (29,30) (31,32)(43,44)의 4판은 유실되었다. 목판은 대부분 전·후면에 1장씩 총 2장이 판각되었다. 마지막 65장을 새긴 목판의 후면은 새기지 않았다. 마구리를 따로 제작하여 장부가 보이게 결구한 형태이다. 반엽에 행자수는 7행 17자로 왕실본 계통의 판본과 동일하다. 판심부의 어미는 상하내향이엽화문의 형태이지만 간혹 흑어미도 혼재되어 있다. 판심제는 약경명인 『중혜문』을 따라서 ‘中’으로 동일하고 그 아래로 장차를 새겼다. 개판기에 이어 시주질과 장인들을 적었다. 목판은 충해나 균열, 글자손상 등이 확인되지는 않는다. 마지막 65장의 마구리가 결손되었다.

10. 『다라니(陀羅尼)』(1)

『다라니』는 악을 없애고 복을 빌거나 죽은 이의 명복을 빌 때, 또는 불·보살을 공양하거나 참회하는 의례와 의식에 사용된다. 본 목판은 판면 전체에 흙, 먼지 등의 오염으로 인해 글자판독이 어려워 정확한 명칭과 간행관련 정보를 알 수 없다.

여수흥국사 소장 다라니(1)은 전·후면에 모두 판각되어 1판 2장이 전한다. 마구리는 따로 제작하여 결구한 다음 측면에서 못을 박아 고정시킨 형태이다. 목판의 전체 크기는 34.5㎝, 가로 42.5㎝이다. 판의 전·후면 전체가 흙과 먼지로 오염되었고 글자 또한 마모가 심해 다라니의 정확한 명칭과 진언의 내용은 확인하기 어려운 상태다. 판면의 광곽은 사주단변에 유계이며 크기는 세로 29.5㎝, 가로 34.9㎝이다. 행자수는 광곽 24행에 정확한 글자수는 파악하기 어렵다. 목판은 훼손이 많이 진행된 상태이다.

11. 『다라니(陀羅尼)』(2)

『다라니』 목판은 전면에 각종 범자들과 탑 형상의 다라니 3기, 선신수호 등의 명칭이 적힌 부적판으로 채워져 있다. 후면은 크기가 다른 2개의 구획을 좌우로 새겼다. 좌측에는 탑 형상의 다라니 2기와 소망성취 등 5개의 부적을 첨부하였고 이보다 작은 우측에는 4행의 범자를 판각하였다.

흥국사에 소장되어 있는 다라니(2)의 목판은 전·후면에 모두 진언과 다라니를 판각하여 모두 1판 2장이 전한다. 장부가 없고 마구리를 결합한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본래부터 마구리는 제작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판면의 형태사항을 살펴보면 광곽은 사주단변의 무게이다. 크기는 세로 25.9㎝, 가로 52.2㎝이다. 판심부는 따로 구획하지 않았다. 개판과 관련한 기록이 없어 개판연대와 장소는 알 수 없다. 전체적으로 전·후면 전체가 목재의 균열로 인해 판각된 면이 고르지 못한 상태이다.

12. 『전라남도순천부영취산흥국사사적』 경판

이 경판은 1691년 승려 통일이 대웅전을 중창하면서 창사 이래 흥국사의 중요한 자취를 목판에 새긴 것이다. 28.0㎝ × 80.8㎝의 유계에 2쪽씩 새겨져 있다. 각각 8행 17자의 내용이 담겨 있다. 현재 2판이 남아 있다. 간기에 ‘강희사십칠년순천영취산흥국사간판(康熙四十七年順天靈鷲山興國寺刊板)’이라고 적혀 있다. 1691년(강희 30) 흥국사의 승려 통일이 대웅전 등의 전각을 중창하면서 보조국사 지눌의 흥국사 창건과 이후의 주요한 내력을 기록한 사적기이다. 목판 첫머리에 ‘전라도순천부영취산흥국사사적’이 적혀 있어 흥국사의 창건과 내력에 관한 사적기임을 알 수 있다. 목판은 전·후면에 각 1장씩 판각되어 총 2판 4장이 온전히 전한다. 목판은 마구리 없이 가로로 긴 장방형이다. 판심부의 어미는 상하하향이엽화문의 형태이며 판심제 없이 장차만 기록하였다. 목판은 별다른 충해나 균열, 글자손상이 없어 전체적인 보존상태는 양호하다.

12. 『유합(類合)』 경판

이 경판은 19×31.8㎝의 유계에 2쪽씩 새겨져 있다. 각각 4행 6자의 내용이 담겨 있다. 현재 16판이 남아 있다. 마지막 32장 간기에 ‘을유년육월이십육일…사개간(乙酉年六月二十六日…寺開刊)’이라고 적혀 있다.

『유합』은 조선시대의 한자 입문서이다. 모두 1,515자가 수록되어 있다. 『천자문』과 함께 널리 사용되었다. 글자의 배열 방법은 『천자문』과 달리 의미에 따라 수목(數目)·천문(天文)·중색(衆色) 등으로 나눈 다음, 4언으로 대구(對句)를 만들고 한글로 풀이와 독음을 달았다. 남아 있는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1664년(현종 5) 안성(安城) 칠장사판(七長寺版)이다. 그 밖에 송광사(松廣寺)·선암사(仙巖寺)·안심사(安心寺) 등의 사찰판과 10여 종의 이본(異本)이 있다.

흥국사 『유합』 경판의 원본이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편찬자는 미상이며, 조선시대의 승려 학민(學敏)이 서사하였다. 1576년(선조 9) 『유합』에 불교를 숭상하는 내용이 있고 자수도 적다고 하여 유희춘(柳希春)이 수정·증보한 『신증유합(新增類合)』이 새로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어떤 이본도 불교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조선 초기의 『유합』을 손질한 것이 지금까지 전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흥국사 소장 『유합』 목판은 29장을 제외하고 1장부터 32장까지 한 면에 한 장씩 판각되어 총 16판 31장이 전한다. 마구리는 따로 제작하여 판목의 장부와 결합하였다. 일부 결손된 마구리도 있다. 전체 크기는 목판별로 조금의 차이가 있다. 반곽의 행자수는 4행6자이고, 판심부는 어미는 대체로 무어미의 형태이지만 일부 화문어미가 혼재되어 있다. 판심제는 20장에만 ‘合’이라고 새기고 있다. 그 외의 판면에는 판심제없이 각 장차만 새겼다. 간행기록을 통해 정확한 간행처, 간행시기를 확인하기 어렵다. 함께 소장되어 있는 천자문 목판의 간기와 서사자가 동일하여 함께 판각했음을 알수 있다. 목판 판면의 마모가 심해 자획 및 변란 등이 훼손되어 있다. 많은 수의 목판에서 마구리가 결손되어 보수가 필요한 상태이다.

14. 『천자문(千字文)』 경판

이 경판은 19.0㎝×41.3㎝의 유계에 2쪽씩 새겨져 있다. 각각 4행 4자의 내용이 담겨 있다. 현재 15판이 남아 있다. 이 경판은 조선시대의 승려 학민(學敏)의 판하본(板下本)에 의한 것으로 절 안의 사미승들을 위한 교재를 인출하기 위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천자문』은 원래 4자 1구씩 250구로 이루어져 있다. 중국 양나라 때 문인 주흥사[470~521]가 무제(武帝)의 명에 따라 하룻밤만에 지었다고 한다. 주흥사가 이 글을 짓고 머리가 하얗게 되어 백두문으로 부르기도 한다.

내용은 자연 현상에서 인륜도덕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며, ‘천지현황 우주홍황(天地玄黃 宇宙洪荒)’으로 시작하여 ‘위어조자 언재호야(謂語助者 焉哉乎也)’로 끝맺는다. 내용 가운데 중복된 글자가 하나도 없으며, 어린이 등의 초보자용 한자 학습에 알맞게 기본적인 글자를 모아 읽기 좋은 문장으로 만들어졌다. 당시 무제가 왕희지(王羲之)의 필체로 서사하도록 하여 왕자들에게 나누어 줄 정도로 주흥사의 천자문은 높이 평가되었다.

우리나라에 천자문이 전해진 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단, 백제 때 왕인(王仁)이 『논어(論語)』와 함께 일본에 전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유통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한호(韓濩)의 『석봉천자문』이다.

흥국사 소장 천자문 목판은 한 면에 1장씩 판각되어 총 15판 30장이 전한다. (17,18)판이 결손되었다. 좌·우 마구리는 따로 제작하여 결합하였다. 전체 크기는 각 목판별로 다소 차이가 있다. 행자수는 반곽 4행 4자이고 판심부는 상하내향향흑어미에 항사대흑구의 형태이며 팜심제는 ‘간’이다. 마지각 32장의 ‘을미계춘학민서훈상사판’의 간행관련 기록이 있다. 이 기록으로는 정확한 간행처와 간행시기의 확인은 여렵다. 함께 소장되어 있는 『유합』 목판의 간기와 서사자가 동일하여 함께 판각했음을 알 수 있다. 목판의 상태는 일부 판면에서 충해와 균열이 확인되며, 휘거나 뒤틀린 경우도 있다. 대부분의 목판이 마구리가 결손되어 보수가 필요한 상태이다.

[의의와 평가]

흥국사가 여수 지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불교와 종교 부문에 국한해서만 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흥국사가 여수 지역에 미친 영향력은 사상·건축·미술·문학·국방 등 실로 전방위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흥국사 불교경판일괄은 흥국사가 여수 지역의 교육·인쇄·출판·조각 등의 분야에서 선진적이고 지속적인 역할을 해왔다는 점을 무언으로 대변하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수정 전의 디지털여수문화대전에서 다루었던 경판과 수정의 경판에서 차이가 보인다. 경판의 제목을 분류하는데도 차이가 있어서 통합된 것과 따로 분리된 것이 있다. 경판의 숫자에서도 391판으로 차이가 보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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