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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국사 공북루 편액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01805
한자 興國寺拱北樓扁額
영어의미역 Tablet of Gongbungnu Pavillion in Heungguksa Temple
분야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물/유물(일반)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중흥동 18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진옥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편액
제작시기/일시 1893년
제작지역 흥국사
재질 나무
길이 270.5㎝
너비 107㎝
소장처 의승수군유물전시관 지도보기
소장처 주소 전라남도 여수시 중흥동 18
소유자 흥국사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 흥국사 의승수군 유물전시관에 있는 조선 후기의 공북루 편액.

[개설]

사찰 배치 구조상 공북루가 있는 곳은 매우 드물다. 공북루는 성의 북쪽 문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북쪽의 성문은 북쪽에 임금이 있다 하여 공북이라 했다. 때문에 흥국사도 승병이 있었으므로 성문이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300여 년에 이르기까지 승병 조직이 있었기 때문에 성문이 있었으리라는 것을 짐작만 했을 뿐 근거 자료가 없었다. 그러다가 1893년 절도사 이봉호(李鳳鎬)가 쓴 「흥국사공북루중수기(興國寺拱北樓重修記)」를 통해 확인되었다.

[형태]

목재로 글씨를 양각하여 테를 두른 전형적인 편액 형식이다. 크게 “공북루”라고 쓰고 향우측에 “계사동수군절도사서(癸巳冬水軍節度使書)”라고 씌여있다. 이는 계사년 겨울에 수군절도사가 썼다는 것이다. 전라좌수영은 1479년부터 1895년까지 존속되었다. 폐영 시까지 계사년은 7번 도래한다. 이 중 어느 계사년인지를 확인해야 한다. 이순신 재직시기인 1593년이 계사년이라 이순신 글씨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흥국사공북루중수기(興國寺拱北樓重修記)」에 1893년에 공북루를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현판의 보존상태 등을 감안할 때 이것은 1893년 계사년에 공북루를 중수하면서 이봉호 수사가 같이 썼다고 보아진다.

서체에 무인의 기상이 느껴지는 힘이 있으며 현판으로서는 매우 큰 편이다.

[의의와 평가]

흥국사에서는 임진왜란 이후 300여 의승수군이 조직되어 활동했으며, 승군의 본거지로 수행처인 사찰과 국가를 위한 호국의 비보가 잘 어우러지는 유물인 성문, 즉 공북루가 있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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