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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 자선기념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01879
한자 李圭莆慈善記念碑
영어의미역 Stele for Yi Gyubo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유적/비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적량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병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건립시기/일시 1949년 7월연표보기
관련인물 이규보
높이 172㎝
너비 130㎝
소재지 주소 전라남도 여수시 삼일동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 삼일동에 있는 일제강점기 이규보의 자선기념비.

[건립경위]

이규보는 천성이 영특하고 부모에 대한 효심이 두터웠을 뿐만 아니라 관리로서 백성을 위해 많은 치적을 쌓았다. 이에 감복한 백성들이 비석을 세워 칭송하였는데, 동문(洞門) 밖에 비를 높게 세워 지나가는 사람들이 절로 머리를 숙이게 하기 위해서였다.

[형태]

비의 규모는 높이가 172㎝이고, 너비는 130㎝이다.

[금석문]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公)의 성(姓)은 이씨(李氏) 휘(諱)는 규보(圭莆), 자(字)는 왈요(曰堯), 백포(栢圃)는 호(號)이다. 경주이씨(慶州李氏)는 고려왕조에 시랑(侍郞)을 지낸 승훈(承訓)으로 상조(上祖)를 삼고 우리 태조대왕(太祖大王)이 개국(開國)하는 처음에 휘 석(碩)이 있으니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제수하되 망복(罔僕)의 의리를 지키어 여러 번 불렀으나 일어나지 않고 남으로 금성(錦城)[羅州]에 내려와 숨어 살았다.

청헌(淸軒) 대립(大立)에 이르러서는 훈련원주부(訓鍊院主簿)로 임진왜란(壬辰倭亂)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策錄)되었고 비로소 여수로 옮겨 살았다. 부호군(副護軍) 흥진(興震), 가선대부(嘉善大夫) 경우(慶祐), 묵재(黙齋), 석룡(錫龍), 농은(農隱), 주영(柱榮)은 4친(四親 : 高祖, 曾祖, 祖, 父)이요, 여흥민씨(驪興閔氏) 통정(通政) 치교(致敎)는 외조(外祖)이다.

공이 헌종(憲宗) 기유(己酉: 1849)년에 출생하여 82세가 되던 경오(庚午: 1930)년에 돌아가시고 장지(葬地)는 본군(本郡) 우손(牛孫) 남쪽 기슭에 손좌(巽坐)의 언덕이요. 배필은 죽산안씨(竹山安氏) 종칠(宗七)의 따님이고 묘소는 쌍봉이다. 아들은 종채(鍾彩)요, 손자는 갑우(甲雨), 정우(丁雨), 감우(苷雨)이다.

공이 돌아가신 지 20년 만에 갑우가 편지와 폐백을 구비하고 실적(實蹟)을 새길 글월을 나에게 청하니 내가 진실로 보잘것없고 또 쇠병(衰病)의 몸으로 어찌 중대한 일을 감내하겠는가 사양하다가 마지못하여 그 행장을 모두 상고하여 보니 공이 천성이 영특하고 또 순후하며 안상하여 기쁘고 성냄을 드러내지 않으며 부모를 섬기되 효성을 극진히 하며 종족(宗族)간에는 서로 화목과 공경을 힘쓰고 널리 대중을 사랑하되 어진 자에게 친하게 하여 울그락불그락한 눈빛을 짓지 않았다.

부모의 상사에는 예절을 따라 하자가 없으니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고종(高宗) 계사(癸巳: 1893)년에 벼슬길에 나가 장사랑(將仕郞) 건원릉(建元陵) 참봉(參奉)이 되었는데 세상이 분주한 파도와 같이 험악하므로 다시 나아가지 않고 널리 경사(經史)를 섭렵하고 곁으로는 의학을 통하여 침구의 보사(補瀉)에 정신을 모아 스스로 치료하여 주므로 이웃에 병자가 있으면 시험할 때마다 효과를 보게 되어 그 신공(神功)을 측량할 수가 없었다.

이때부터 소문이 자자하여 멀고 가까운 데서 그림자 따르듯이 병을 치료하는 자가 하루에 오륙십 명씩 되므로 안과 밖에 나누어 거처시키고 모든 기구를 많이 설비하여 여름에는 서늘하게 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주되 제반에 비용을 하나도 병자에게 미치지 않으며 조석에 대접도 또한 자기가 마련하고 대가를 받지 않았는데 50년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하여 향리(鄕里)에서 감복하고 비석을 세워 칭송하였으니 지금 동문(洞門)밖에 높은 비(碑)가 지나다니는 자로 머리 숙이게 함이 이것이다.

옛날에는 여산(廬山)에 사는 동봉(董奉)이 사람의 병을 의료하되 값을 받지 않고 다만 은행나무를 심게 하였는데 몇 해가 안 되어 숲을 이루었으므로 드디어 천고(千古)에 기이한 일을 삼았는데 지금 공의 일이 가히 동봉(董奉)과 더불어 짝을 삼을 만하다. 알지 못하겠지만 조석의 대가(代價)를 받지 않음이 동씨(董氏) 집안에도 그러했나? 지금 온 천하가 이익만을 숭상하여 터럭 끝까지 다투는데 공의 풍치를 듣는다면 거의 가히 조금이라도 나을 것인가? 도유적분약(屠維赤奮若)(己丑: 1949) 맹추(7월) 서주 정기 지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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