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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01967
한자 進禮萬戶鎭
영어의미역 Jillye Naval Office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장여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연도/일시 1396년경연표보기

[정의]

1396년 전라남도 여수시 삼일동 신덕포에 있던 수군기지.

[변천]

조선 건국 당시에는 전라도 해안을 지키는 전라도 처치사영(處置使營)이 옥구(沃溝)에 있다가 1408년(태종 8) 12월에 옥구가 전라도 해안선의 중앙에 위치하지 못한다는 전라도 도절제사(都節制使)의 상계(上啓)에 따라 무안현 대굴포(大堀浦)[전라남도 함평군 학교면 곡창리]로 옮겼다.

수군처치사(水軍處置使) 밑에서 전라우도(全羅右道)를 지키는 전라우도 도만호(都萬戶)도 처음에는 검모포(黔毛浦)[부안]에 있다가 1425년(세종 7) 2월에 전라감사의 상계에 따라 함평현 원곶(垣串)으로 옮기고 이곳에 있었던 임치만호(萬戶)를 혁파하였다. 전라좌도를 지키는 전라좌도 도만호(都萬戶)는 여도량(呂島粱)[고흥군 점암면 여호리]에 있었는데, 그 관하에 만호진이 8개나 있었다.

전라남도 여수 지역에는 진례만호진 및 돌산만호진이 있었다. 진례만호진은 여수시 삼일동 신덕포로 추정되며, 돌산포 만호진은 화양면 용주리이다. 그러나 이 두 곳은 모두 문제를 안고 있다. 즉 진례만호진이 언제 어디에 설치되었느냐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돌산포 만호진이 언제 이곳에 설치되었느냐 하는 문제이다.

진례만호진은 『세종실록』3년 7월 신사조(辛巳條)에서 처음 보이지만, 이곳은 고려 말 우왕 때 정지(鄭地)가 왜구를 소탕한 남해 관음포(觀音浦) 바다 건너편인 여수반도 동북쪽에 설치되었으며, 남해도와 여수반도 사이를 지킬 수 있는 요지이다. 이러한 점에서 고려 말부터 설진되었던 것으로도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이 건국된 뒤 태조는 방왜(防倭)를 위하여 1393년(태조 2) 아들 이방원과 전주절도사 진을서(陳乙瑞)를 전라도에 파견하였다가 1396년(태조 5) 8월 충청, 전라, 경상도 경차관으로 심유정, 오용권을 보내어 해방(海防)을 굳게 하였을 때 돌산진과 더불어 설진(設陣)된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현황]

진례량의 위치는 지금의 여수시 삼일동 신덕포와 낙포로 추정하는 설이 있는데, 첫째 신덕포로 추정하는 이유인즉 지금의 삼일동 상암[진례]을 중심으로 해안선을 따라 살펴볼 때 해안에 백도가 있어 조석이 빠르고 방패 구실을 하여 천연의 만입과 전망이 좋기 때문이다.

둘째 진례량이 신덕포의 이웃 낙포라 주장하는 의견은 진례만호진을 내례포로 옮긴 이유를 들고 있다. 『세종실록』에 전라감사가 “도내의 진례량(進禮梁)의 병선(兵船)을 내례량(內禮梁)으로 옮겨 경상우수영(慶尙右水營)의 서편을 관장하는 남해도(南海島) 평산포만호진(平山浦萬戶鎭)의 병선(兵船)과 마주 대하여, 봉화(烽火)로서 서로 연락하는 방어선으로 하는 것이 타당하다.” 는 장계를 조정에 올려 세종이 이를 윤허하여 내례포로 옮겼다.

이상 장계 내용을 보면 내례포로 옮겨 평산포와 마주보게 하자는 것인데 신덕은 평산포와 마주보고 있는 곳으로 옮길 이유가 없어 평산포가 보이지 않는 낙포라는 것이다. 또 하나의 설은 낙포와 이웃해 있는 군장(軍藏)이란 마을이 진례만호진일 수도 있다는 설이다. 이곳의 다른 이름은 군령포(軍令浦), 군영포(軍營浦)로 군대가 주둔했음을 유추해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지명인 것이다.

이곳의 지명 유래를 보면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대립(李大立)이 진을 쳤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확인되지 않은 사실로 단순히 충무공과 임진왜란 사를 확대한 전설이라면 군장부락이 진례만호진이라는 설을 전혀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아울러 위치상으로 볼 때 두 번째 설과 일치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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