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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돌산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01977
한자 古突山鎭
영어의미역 Godolsanjin Fort
이칭/별칭 돌산포만호진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용주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병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연도 조선 전기
폐지연도 돌산포만호진 1523년(중종 18)|고돌산진 1895년(고종 32)

[정의]

조선 전기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용주리에 설치되었던 수군기지.

[제정경위 및 목적]

『문화유적총람』에는 1488년(성종 19)에 설진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무렵엔 이미 이곳에 진성이 축조되고 있었을 때이므로 성종조 설진설은 잘못된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설진과 축성의 순서를 보면 고돌산진뿐만 아니라 어느 수군 기지든지 처음에는 진을 설치하고, 진을 설치할 때는 간단한 여사 정도만 만든다. 그러다가 수군들이 근무하기에 불편을 느끼고 해풍 때문에 병기 보관이 어렵게 되면 진을 중심으로 성을 쌓아 수군의 본격적 거점을 확보하게 된다.

『태종실록』 8년(1408) 정월조에 법성포(法聖浦)와 탐진포(耽津浦) 만호(萬戶)를 벌하고 돌산포만호에 충당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보아 고돌산진은 고려 말 조선 초에 설진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여수반도에는 전라남도 여수시 삼일면에 있었던 진례만호와 화양면 용주리에 있었던 돌산포만호가 왜구 방어의 임무를 띠고 있었다.

[변천]

1423년(세종 5)에 진례만호는 내례포로 옮겨 내례만호가 된다. 1480년(성종 11)에 내례만호는 다시 전라좌도수군절도사영(전라좌수영)으로 승격된다. 전라좌도수군절도영이 설영되면서 돌산포만호 역시 전라좌수영 관할이 되었다. 중종 때에 이르러서는 남해안에서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수군진의 일부를 보강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돌산도 방답진에 새로 진을 설진하여 돌산포의 군선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돌산포만호진을 폐진하기에 이른다. 이후 수군만호를 혁파하고 권관을 두었다가 후에 소모진으로 고치고 다시 별장으로 낮추었다.

임진왜란 후 남해안의 왜구 방어에 더욱 힘써 수군진을 대폭 증설 개편하였다. 이러한 국가 시책에 따라 1611년(광해군 3)에는 옛날의 돌산포만호진을 고돌산진으로 개칭하여 새로운 수군진으로 정비하기에 이른다. 『여수읍지』에 따르면 1895년(고종 32)에 고돌산진방답진과 함께 폐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치]

고돌산진 터는 여수만의 안쪽 여수시 화양면 용주리 고진에 위치하고 있다. 북쪽으로는 고외마을로 통한다. 남문과 수구문 밖이 바다로 연결되어 있다.

[현황]

진성(鎭城)은 나지막한 야산의 중복에서부터 작은 골짝기와 평지를 포괄하는 평산성(平山城)으로 축조되었다. 『성종실록』(성종 21) 1490년 6월 28일 관방(關防)조에 “전라도(全羅道) 돌산포(突山浦)에 성을 쌓았다. 높이가 13척이고, 둘레가 1천 3백 13척이었다.”라는 기록으로 초기 성의 크기를 알수 있다. 『만기요람』 〈군정편〉과 『호남읍지』에 “전선 1척, 병선 1척, 하후선 2척 등이 있었다. 그 외에 공창(廳舍)으로는 동헌 4간, 내아사 8간, 군기고 1간, 화약고 1간피, 복파정 5간, 군관청 8간, 진무청 9간, 통인청 5간, 사령청 8간, 저치청 5간, 선창집물고 4간 등 공공건물이 즐비하였다. 요원으로는 별장 1명, 군관 36명, 진무 21명, 통인 15명, 사령 21명, 군뢰 2명, 기수 2명, 자모군 118명, 초둔군 2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민호는 성내에 82호, 성외에 62호가 있었다.” 라고 하였다. 지금은 외성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내성은 거의 허물어져 성태만 남아 있어 옛날 수군진의 면모를 찾아보기 어렵다. 내성의 동헌터에는 지금도 석축으로 된 담장이 남아 있다. 마을 앞 굴항이 있던 자리는 주차장으로 변했다. 일제 강점기 시 동헌을 헐어 그 목재로 화양면사무소를 지었다가 다시 면사무소 개축 때 용문사로 옮겨 법당을 지었다고 한다.

마을 어르신들은 마을 유래에 대해 임진왜란 때 “고돌산진”이라고 해서 우리 수군이 주둔하고 있었던 곳으로 그때 불리던 고돌산진이라는 지명이 지금은 고진리(古鎭里)로 불리고 있으며, 이 마을을 에워싸고 큰 토성(土城)이 있었다 한다. 당시 이곳에 김씨, 차씨, 박씨 성을 가진 3명의 엄호장군이 있었는데 그 이름은 알 수 없고, 대신 대포가 달린 큰 전함을 지휘하던 장군과 나머지 두 장군은 보급선을 지휘하던 역할을 수행했다 한다.

옛날 성의 모습이 남아 있을 때까지만 해도 고내(古內)와 고외(古外) 두 마을 사람들이 합해서 ‘성제’를 지냈고, 차츰 성의 형태가 사라지면서부터는 음력 정월 초하룻날 밤에 고내리 사람들만 뜻을 모아 제를 지낸다고 한다.

[의의와 평가]

고돌산진은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영 관하 오관(五官)·오포(五浦)에는 들어가지 않았지만, 전라좌수영이 설진되기 전부터 있었던 수군기지로, 돌산도 방답진으로 이설되기 전 고돌산진의 역할은 상당히 중요했음을 알 수 있고 방답진으로 이설된 후로도 소모진으로 국토방위의 임무를 다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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