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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동목관 선정비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01989
한자 華東牧官善政碑群
영어의미역 Memorial Stones for Gokhwa Ranch Managers
이칭/별칭 백야곶목장감목관선정비군(白也串牧場監牧官善政碑群)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화동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병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건립시기/일시 1833년연표보기|1838년연표보기|1854년연표보기
관련인물 구준원|김시좌|정현|윤동철
재질 사암|화강암
높이 110㎝
너비 40㎝
소재지 주소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화동리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 화양면 화동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백야곶목장[곡화목장] 감목관들의 선정비.

[위치]

화양면 화동리 여수화양고등학교 앞 도로가의 느티나무 숲에 있다.

[형태]

비의 형식을 갖춘 비석 입비(立碑) 3기는 도로가에 나란히 세워져 있다. 향좌로부터 높이 130㎝, 폭 40㎝의 "행감목관구후준원구민선정비(行監牧官具侯駿遠救民善政碑)", 높이 110㎝, 폭 40㎝인 "행감목관김후학례영세불망비(行監牧官金侯學禮永世不忘碑)가 있다. 가장 왼쪽에는 “동암이두표선생공적비(東嵒李斗杓先生功績碑)”가 따로 비각을 만들어 관리되고 있다. 동암 이동표는 본관이 전주로 효령대군 18대손이다. 화양초등학교의 전신인 사립보통학교를 설립하였고 화양면장 재직시엔 현대식 간선도로를 설치하여 화양면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이다. 음기에 ‘계축초춘(癸丑初春)’이라고 음각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973년 봄에 세운 비이다.

첫번째 비석은 감목관 구준원의 비로서 뒷면 비문의 판독이 어렵다. 다만 끝부분에 "도광십삼년계사사월립감역심득□(道光十三年癸巳四月立監役沈得□)"라고 기록되어 있어 1833년(순조 33)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비신은 비교적 깨끗하나 가첨석이 반쯤 깨져서 없어졌다.

두 번째 비석은 감목관 김학례의 영세불망비이다. "함풍사년갑인(咸豊四年甲寅)"이라는 연대가 확인되어 1854년(철종 5)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현재는 가첨석이 없이 비신도 박락현상이 심해서 비갈명을 알아보기 어렵다. 가첨석은 원래 없었던 게 아니고 주변의 파편들과 비(碑) 상부의 흔적으로 보아 후대에 훼손되어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음기는 원래 있었는지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박락이 심하다.

원래의 향우측에는 비좌에 비신이 30㎝ 정도만 남아 있는 비가 하나 더 있다. 그 좌측으로 비좌만 남아 있는 또 다른 1기가 있다. 하지만 2기 모두 어떤 비인지 안내문 등도 없어 알 수는 없다. 전체적으로 불과 100여 년 전에 세워진 비가 이렇게 많이 훼손된 것은 감목관의 지방민에 대한 횡포가 심했던 것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선정비를 ‘악정비(惡政碑)’로 여기는 지방민의 감정과 갑오농민전쟁 때 동학군과 감목관이 손을 잡았기 때문이라는 설도 전해지고 있다.

고인돌에는 세 명을 한 돌에 각석한 것과 두 명을 한 돌에 각석한 2기의 마애비가 있다. 앞쪽에 있는 세 명의 비석은 향좌측으로부터 "행감목관김후시좌선정비(行監牧官金侯時佐善政碑)", "행감목관송후유식선정비(行監牧官宋侯維栻善政碑)", "행감목관정후현선정비(行監牧官鄭侯鉉善政碑)"가 나란히 새겨져 있다.

공통적으로 가로 40㎝, 세로 110㎝의 크기이다. 뒤쪽에 있는 것은 향좌측으로부터"행감목관윤후동계선정비(行監牧官尹侯東啓善政碑)", "행감목관신후□선정비(行監牧官申侯□善政碑)"라고 2기가 새겨져 있다. “行監牧官申侯□善政碑” “후” 뒤의 마모된 글씨는 “身+近”으로 보인다. 감목관 명단 등이 있으면 추정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고인돌 비석들의 음기는 “戊戌 日 八月”이라고 되었다. 이것을 1778년(정조 2)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1838년(헌종 4)이라고 해야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현황]

비석들은 사암으로 마멸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고인돌의 덮개돌에 새겨진’마애비 선정비’는 석질이 단단하여 비교적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총 8기 가운데 3기는 입비(立碑)였다고 하나 현재 입비는 2기만 남았다. 5기는 고인돌에 새겨졌다. 그중 하나에는 3명, 다른 하나에는 2명의 비명(碑銘)이 있어 전체 8명이 기명(記名)되어 있다. 다만 입비는 지대석만 남은 하기와 비신이 30㎝ 정도 남은 한기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초 입비는 4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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