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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02189
한자 鄭以吾
영어음역 Jeong Io
이칭/별칭 수가,교은,우곡,문정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묘도동
시대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준옥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출신지 경상남도 진주시
성별
생년 1347년연표보기
몰년 1434년연표보기
본관 진주
대표관직 대제학

[정의]

고려 말에서 조선 전기 전라남도 여수 묘도 지역에서 시를 남긴 문신.

[가계]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수가(粹可), 호는 교은(郊隱)·우곡(愚谷). 찬성사 정신중(鄭臣重)의 아들이다.

[활동사항]

정이오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고 성품도 질박하고 겉치레가 없었다. 일찍이 목은(牧隱)과 포은(圃隱)의 문하(門下)에 들어 학문을 닦았는데 문장이 뛰어나 동료들로부터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1374년(공민왕 23)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 공조와 예조의 정랑을 거치고 전교부령(典校副令) 등을 역임하였다.

고려 말 급박하게 돌아가는 세상을 등지고 은거하고 있다가 태조가 등극한 3년 후에 다시 벼슬길로 나아가 군왕의 정치에 도움이 될 만한 경사(經史)를 간추려 올리고, 조준(趙浚)·하륜(河崙) 등과 함께 『사서절요(四書節要)』를 편찬하기도 했다. 1400년(정종 2) 성균관악정(成均館樂正)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병조의랑(兵曹議郎), 예문관의 직제학, 성균관의 사성을 역임하였다. 1403년(태종 3)에는 학덕의 권위로 대사성으로 승진했고, 1409년 병서습독제조(兵書習讀提調)를 거쳐 동지춘추관사를 겸임하며 『태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13년 예문관대제학이 되어 봉직하다가 나이가 70에 이르러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나 있었다. 그러나 같은 해 세종이 즉위하자 다시 왕가의 태를 묻을 장소를 물색하는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로 발탁되어 전국을 누볐다. 그 일이 끝난 뒤에는 노성(老成)한 덕이 있다 하여 숭정대부(崇政大夫)에까지 올랐다.

[저술 및 작품]

정이오가 언제 무슨 연유로 여수시 묘도와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다음과 같은 시 한 수가 전한다. “내 고향은 어디에 있는가/구름 끼고 물결 일어 알 수가 없네/하늘을 쳐다보고 땅을 굽어보아도/두려움과 슬픔이 반반일세/나루에 봄이 와도 조수는 넓디넓고/날 저문 선창에 저녁달이 떠오르네/남아로 태어나 나랏일을 할 것 같으면/하필 태평한 때만 그리워하는가(鄕國知何在 雲濤杳莫期 二儀寬仰俯 百歲半懼悲 津春潮闊闊 船窓暮月遲 男兒如報國 何必遇濟時).”

이 시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침울하고, 암담하며, 회한도 깃들어 있다. 정이오의 이력 속에서 이 시가 쓰인 연대를 추적해보면 고려 말의 정치적 혼란기가 아닐까 판단된다. 고려 말에 두문동으로 숨어 들어간 72현처럼, 정이오도 혼란기를 피해 여수 묘도에 잠시 머물면서 이 시를 탈고하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상훈과 추모]

영의정에 추증(追贈)되었으며 문정(文定)이라는 시호도 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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