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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죽도해전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03020
한자 巽竹島海戰
이칭/별칭 손죽도 사건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손죽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정태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해전
발생(시작)연도/일시 1578년 2월 1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578년 2월 4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여수시 삼산면 손죽리 손죽도지도보기
관련인물/단체 이대원

[정의]

1587년(선조 20) 손죽도 앞바다에 침입한 왜구와 전라좌수군이 벌인 전투.

[발단]

1587년 1월 말경에 일본 규수의 오도(五島)와 평호도(平戶島) 출신들이 탄 왜선 두어 척이 흥양 녹도진[현재 고흥군 녹동] 앞바다를 침범했다. 보통 때 같으면 동남풍이 부는 4월 이후에 왜선이 들어오는데, 이번에는 예상을 깨고 일찍 침범했다. 녹도 만호 이대원이 경황이 없어 주장에게 보고하지도 않은 채 혼자서 출동하여 그들을 쳐서 수급을 베었다. 그러자 전라좌수사 심암(沈巖)은 전공을 독차지했다고 이대원을 미워하여 두 사람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수일이 지난 2월 1일, 왜선 18척이 전라도 흥양 손죽도[현 여수시 삼산면 손죽리 손죽도]를 침범하여 점령했다.

[경과]

이대원은 심암의 명에 의해 피로에 지친 군사 100여명을 이끌고 출병했다. 이때 이대원은 “지금 해도 저물었고 또 군사들도 적어 덮어놓고 출전하는 것은 무모할 따름이니, 군사를 더 많이 모으고 선단을 크게 지어가지고 내일 아침 날이 밝은 다음에 효과 있게 치고 나가는 것이 옳은 줄 압니다.”라고 심암에게 진언했으나, 심수사는 도리어 협박까지 하면서 즉각 출전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이대원은 “그러면 사또께서 곧 뒤미처 응원군을 거느리고 와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고 출전했다. 손죽도 해상에서 조총을 쏘아대는 적과 3일간 전투를 펼쳤으나, 심암은 쳐다만 보고 구원병을 보내지 않았다. 중과부적과 화력 열세 상태에서 모든 군사를 잃어버리고 배조차 남김없이 다 깨지고 말았다. 이대원은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칼을 들어 자기 손가락을 잘랐다. 그리고 속저고리를 벗어서 거기다 손가락의 피로 최후의 절명시 한 장을 써서 집안 하인에게 주며 “이것을 가지고 고향에 돌아가 장례하라”고 말했다.

그 끝에 이대원은 적에게 붙잡혀 항복하라고 위협했으나 굴복하지 않자 왜인들은 배의 돛대에 묶어 놓고 사정없이 때렸다. 그러나 이대원은 죽을 때까지 꾸짖는 소리가 입에서 끊이지 않았다. 마침내 손죽도 뭍으로 끌려나와 수하 병사들과 함께 살해당하여 22세의 청년 장군은 목숨을 잃었다. 왜인들이 만행을 저지른 곳을 현재 현지인들은 ‘무부장터’라고 하고, 당시 손죽도 사람들이 이대원 시신을 가묘를 써서 매장했다고 한다. 집안사람들은 유언을 받들어 혈서로 쓴 옷을 가져다가 양성현 대덕산 아래에 장례했다.

왜인들은 손죽도에 이어 선산도를 약탈한 후 납치한 백성들을 배에 태우고 연해를 돌아다니며 강진의 가리포진[현재 완도]까지 넘어갔다. 이들의 공격으로 가리포군은 주둔지를 점령당하여 병선 4척을 빼앗겼고, 첨사 이운은 왼쪽 눈에 화살을 맞고 퇴각하고 말았다. 전라우수사 원호가 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속수무책으로 가리포진이 함락되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을 안 조정은 한성 우윤 신립을 우방어사로 삼아 군관 30명을 거느리고 그날로 내려가게 하였다. 그리고 변협을 좌방어사로 삼아 밤을 새워 남쪽 지방으로 출정하게 하였다. 우참찬 김명원을 전라도 순찰사로 삼아 손죽도를 침범한 적을 치게 했다. 전라감사 한준은 도내의 고을에 전령하여 군사를 일으켜 적을 막게 하였으나, 5-6일이 지나도 해변에 적의 기척이 없어 각각 진을 파하였다. 모두 왜구가 이미 물러난 뒤 뒷북치기였다.

심암은 병력, 무기, 전술, 기세 등 적의 전력을 소상히 보고하지 않았다. 스스로 군율을 어긴 것을 알고 적세가 대단하다고 거짓으로 아뢰고 내지의 군사를 징발하게 하여 정부의 대응전략 수립에 차질을 빚게 하기도 했다. 당시 아군의 피해는 막대했고 전투 결과는 참혹한 패배였다. 적과 만나 대전하면서 장병을 천여 명이나 잃었건만 왜적의 머리 하나 참획하지 못할 정도였다. 이대원이 전사했고, 중위장으로 출전한 순천부사 변기는 퇴각 도중 적의 화살에 맞았다.

[결과]

임금은 패전과 군율 미준수 책임을 물어 심암을 조사할 것도 없이 “의당 형구에 채워 본도로 이송한 뒤, 문에서 참수하여 여러 진에 조리를 돌려야 된다.”고 하여 서울 당고개에서 효수되었다. 이에 앞서 양산룡 등 전라도 유생들도 심암의 죄를 논하고 처형을 주장하자 임금은 참으로 가상하다고 답변했다. 우수사 원호 또한 복병선 5척이 피침하였으나 따라가 잡지 않았다고 하여 국문을 받았다. 이 외에 여러 장수들이 힘써 싸우지 않았다거나 늦게 출동했고, 달아나 숨었다는 이유로 문책을 받았다. 전라감사 한준도 이대원이 패하여 죽을 당시 순천에 도착하여 적의 형세가 왕성하다는 말을 듣고 내지로 급히 돌아가자 노약자들이 길을 막고 붙들면서 호소했지만 돌아보지도 않고 벌벌 떨며 물러가 웅크렸기에 남쪽 백성들에게 욕을 먹었다고 하여 파직 당했다. 곧이어 한준은 호조 참판과 우참찬을 거쳐 황해도 관찰사가 되어 정여립 사건을 최초로 고변하였으니, 전라도와 남다른 인연을 맺은 인물임에 분명하다.

이 때 왜인들은 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살해하고, 수백 명을 납치하여 끌고 간 후 외국에 팔아넘기기도 하였다. 조정은 대응책 마련에 부심하기 시작했다. 3정승, 비변사 당상, 병조 당상이 집결한 어전회의에서 전라도와 인접한 충청도가 불안하다는 의견에 따라 대응력이 부족한 감사를 교체하는 일이 벌어졌다. 경상도에도 신각을 방어사로 내려 보냈다. 임금은 적이 비록 물러났으나 이는 우리를 유인하는 것이라고 판단한 후 군기를 수리하고, 봉수나 망대 등의 일을 단속하여 경계 태세를 태만히 하지 말도록 지시했다. 물러난 적들이 다시 나타나 언제 전면전이 일어날지 모르겠다고 판단한 임금은 병조에 만반의 준비 태세를 강구하도록 지시했다.

적의 침략이 예상되는 전라도의 가리포와 진도 및 제주 등 3읍과 법성창과 군산창 등 2창에 대한 방비를 강화하고, 무신과 잡류 및 공사천으로 활쏘기에 능한 사람을 선발하고 대오를 편성해서 유사시를 기다리게 하고, 궁시와 총통 및 철갑과 철환 등 무기를 갖추어 놓겠다는 것이 병조의 답변이었다. 전국이 준전시 상황에 접어들 정도로 긴박하게 움직였다. 을묘왜변 때도 전라도 강진·해남 지역이 유린당했기 때문에, 특히 전라도의 연해지역에 대한 방어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에 왜군은 방비가 튼튼한 전라도로 들어오지 않고 근래 외침을 겪지 않은 부산포로 들어왔다. 어떠하든 간에 긴박한 가운데, 사을화동(沙乙火同)이라는 조선인의 유인에 의한 소행이라는 사실이, 납치에서 도망친 사람으로부터 보고되었다. 곧 바로 침략자는 물러났지만, 손죽도 사건은 정부의 외교정책 수립과 호남 지방의 민심 동향에 미친 여파는 심대했다.

[의의와 평가]

고흥 연해안 사람들은 심암의 태도에 분개하고 이대원의 죽음을 애도하여 가련한 노래를 지어 불렀다. 송강 정철의 큰아들 정기명(鄭起溟)[1558~1589]은 「녹도가(鹿島歌)」를 지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은봉 안방준(安邦俊)은 15살이던 이때에 이 소식을 듣고 「이대원전」을 지었다. 그의 「연보」에 따르면, “당시 왜적이 들어와 노략질을 하자, 녹도 만호 이대원이 힘껏 싸우다 죽으니 선생이 절의를 가상히 여겨 전기를 지어 기록하였다. 조정이 이대원의 절의를 자세히 몰랐는데 선생으로 말미암아 없어지지 않게 되었다. 선생은 어린 나이에 이미 절의를 숭상하여 권장함으로써 세상에 일컬어졌다.”고 하여, 안방준은 이대원의 절의를 높이 사 「이대원전」을 지었으나 현재 원문은 남아 있지 않다.

손죽도는 화살용 전죽(箭竹)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지만, 온 나라 사람들은 이대원이 죽자 슬퍼하면서 손죽도손대도(損大島)라고 했다고 한다. 이 점에 대하여 순천부사를 역임하여 손죽도 사건을 익히 알고 있을 이수광(李晬光)도 기록을 남겼다.

죽을 우리말로 대로 부르기 때문에 이대원 순국 이후 조선 사람들은 손죽도손대도라고 불렀고, 결국 손대도이대원을 잃게 한 섬이라는 말이었다. 이대원의 대 자와 음이 서로 같아서, 이대원을 손상시킨다는 말이 은연중 포함되어 있다고 이수광은 민간의 떠도는 말을 채록하여 기록으로 남겼다.

이대원의 죽음은 호남 사람들에게 강한 메시지를 던져주었을 것이다. 남구만이 쓴 신도비명에는 “임진왜란에 호남 지방이 유독 완전하여 다시 나라를 일으키는 근본이 되었으니, 이는 공이 먼저 왜적에게 몸을 맡겨서 사람들의 마음을 장려하고 분발시킨 효험이 아니라고 하지는 못할 것이다.”고 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주력부대로 왜란 극복의 원동력이 되었던 전라좌수군의 전력은 이대원의 장렬한 죽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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