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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03046
한자 金守坪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병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정치인
출신지 여수시
성별
생년 1907연표보기
대표경력 건국준위윈회 여수치안부장|6 25 때 인민위원장

[정의]

광복 공간에서 6.25 전쟁까지 활동한 정치인.

[활동사항]

보성전문대학과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건국준위윈회의 여수치안부장 그리고 6. 25전쟁 때 인민위원장 역임하였다. 김수평은 광복 공간에서 여수 지역의 중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경력에서 볼 수 있듯이 광복 후 좌익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그에 관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여수·여천향토지』와 문정인의 기록을 통하여 김수평을 단면이나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건준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들은 관내 치안 확보였다. 일경은 있다고 하나 이미 패망한 처지라 힘을 쓰지 못하고 대신 건준 산하의 김수평이 이끄는 치안대의 역할은 참으로 눈부신 바 있었다.”

“광복 후 악질적인 일경과 악질 관리들이 테러를 당하지 않은 이유는 본디 양순한 이곳 사람들의 기품에다가 김수평이 이끄는 치안대의 노력에 힘입은바 있다고 할 것이다.”

다음은 6.25 전쟁 당시 여수시 여맹위원장을 지낸 정기순의 증언과 김수평의 재심 청구장을 중심으로 김수평을 회고한 내용이다.

김수평 선생 하면 여수에서는 광복 후 초대 여수서장을 지낸 분, 좌익계 우두머리, 공산당원, 잘 생기신 정력가 등등으로만 알고 있을 뿐 가까운 이웃이면서도 정작 그의 행적에 대하여 잘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김수평 선생은 1953년 9월 군산에서 체포되어 11년 형을 살고 1963년 출옥했다. 1년 뒤인 1964년에는 부인 정기순 여사가 체포되어 3년 형을 살고 출옥했다.

저자가 김수평 선생 편을 수록하는 데는 저자 나름대로 바라 본 김수평 선생에 대한 이념을 떠나 순수한 인간으로서의 김수평 선생에 대한 느낌도 적고 싶었지만 그보다도 6.25란 참변을 겪고서도 적 치하에서 67일 동안 여수에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하였었는가에 대하여 이야기하여 주는 사람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고, 향토사에 마저 기록된 것이 없었는데 여기에 수록한 한 통의 재심청구서에서 많은 자료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를 기해 6.25가 터지고 이틀만인 27일에 정부가 대전으로 갔다가 다시 20일 만인 7월 17일에 부산으로 옮겨갔다. 여수의 행정기관, 유지, 부유층들은 선박을 이용하여 경남 욕지도 및 부산 등지로 피난을 가고 서민층만이 살고 있는 여수에 인민군들이 7월 25일에 무저항 무혈 입성하였다. 그러자 여순 14연대 반란사건에 직접 간접으로 관련되어 피해를 보거나 숨어 있던 사람들이 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우익인사 색출, 가옥 몰수 등을 하면서 관공서를 접수하였다. 인민위원회는 행정을 맡은 시청과 같고, 내무서는 경찰서와 같고, 정치보위부는 정보기관인 것 같은데 북한과 같은 1당 체제에서는 노동당 위원장이 수석 행정기관인 것 같다. 이러한 체제로 적 치하에서 여수는 비교적 안정된 가운데 생활했던 것 같다. 일단 인근으로 피난 갔던 서민들이 돌아오고 서정시장에는 길거리에 음식 및 술집이 평소와 다름없이 성시를 이루어 전쟁 때라는 느낌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평온했었다고 향토지에 적혀 있다. 그러다가 67일간의 적하 통치가 끝날 무렵인 9월 29일 후퇴 명령이 떨어지자 내무서에 구금되어 있던 우익인사와 경찰관들을 미평 산장과 둔덕재에서 73명이나 사살하여 버렸다. 이 때 학살을 결정짓는 기관장 회의에 인민위원장으로서 참석을 했는지 안 했는지에 따라 김수평 선생의 살인음모 죄 여부가 가려지게 되는 것이다. 재심 청구장에서 보면 그러한 일은 치안을 맡는 내무서나 정치보위부 소관이며 행정을 맡은 인민위원회 소관이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고 있다. 결국 김수평 선생은 살인음모 죄는 적용 받지 않고 국가보안법 위반죄만 적용 받고 형을 산 것 같다. 김수평 선생은 말미에 “나는 해방 후 혼돈의 시기에 여수 치안을 책임지고 있었지만 그 때에도 한 사람도 다치게 한 적이 없다. 여천군민과 여수시민에게 물어 봐주기 바란다. 나는 깨끗한 모습으로 백년은 살아도 추한 모습으로 만년을 살고 싶지 않는 사람이다.” 라고 절규하고 있다. 김수평 선생은 국가의 이념을 따르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스스로 그 죄를 인정하고 15년이라는 형을 살아 죄 값을 지불하였다. 그리고 홀가분하고 떳떳이 여주 땅에서 서투른 농사일을 하시다가 한 많은 이 세상을 홀가분하게 떠나셨다. 필자는 나이는 어렸지만 일제하에 일본에서 태어나 광복과 14연대반란사건과 6.25를 한 하늘 한 고장에서 살면서 그의 자식들과는 호형호제하며 가깝게 살아온 관계다. 유난히도 기골이 장대하고 눈썹이 짙었던 김수평 선생에 대한 인상과 허름한 차림으로 제중병원 옆에서 주류상을 하던 시절에 말수가 적은 김수평 선생에 대한 인상밖에 갖지 못한 터이다. 그러나 일제하에서도 일본인들에게 굽히지 않고 조선민족 정신 독립을 위하여 사회운동을 하던 시절의 이야기와 광복 후 혼돈의 시절 주위의 추천으로 여수 치안대장과 초대 경찰서장을 하면서 한 토막의 추문도 남기지 않고 도도하게 사신님의 흔적을 살피면서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것 이외는 인간으로서 한 점의 오점 없이 살았는데도 김수평이란 이름만 들먹여도 벌을 받을 것처럼 쉬쉬하여야 하고 당시에 핏덩어리로 태어난 자식들이 성장하면서 연좌제에 묶여 45년 동안이나 떳떳하게 살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03.11 여수문화원장 문정인 관련 정보 수정 김수평의 둘째 부인이었다는 오류 내용 삭제하여 내용 정리
이용자 의견
오** "..... 다음은 여수문화원장을 역임한 문정인이 김수평의 둘째 부인이었으며,....
=====> 문정인 원장은 남자였습니다. 이부분 수정해주세요.
  • 답변
  • 디지털여수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부분 확인하여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였습니다. 지속적인 관심 부탁드립니다.
2019.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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