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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암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31020
이칭/별칭 화춘대남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박종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16년 5월 12일연표보기 - 김초암 출생
몰년 시기/일시 1958년 7월 14일연표보기 - 김초암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11년 3월 1일연표보기 - 김초암 건국포장 추서
출생지 여수군 - 전라남도 여수시
거주|이주지 여수군 - 전라남도 여수시 관문동지도보기
학교|수학지 여수공립보통학교 - 전라남도 여수시 서교1길 29[서교동 898]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여수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김초암은 일찍부터 확고한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던 청년으로서, 특히 일본인과 조선인의 처우가 현저하게 차별적이고 좋지 않다는 점을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거론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활동 사항]

김초암은 1916년 5월 12일 전라남도 여수군 여수면에서 태어났다. 1931년 3월 여수공립보통학교[현 여수서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광주일보 여수지국에서 배달원으로 일하였다. 이후 여수군 남면 화태리에서 화태-여수 간 연락선 매표원, 여수 방파제 공사장 인부로 일하였다.

여수군 여수읍 소재의 여수우편국(麗水郵便局)에서 우편배달부로 근무하던 중인 1942년 2월 24일 김초암은 우편국 대기실에서 점심을 먹던 중 박귀금 등 두 명에게 “일금 1원 20전으로 먹고살 수 있겠는가? 우리 조선인의 일은 어려우나 급료는 적고 좋은 자리에도 올라갈 수 없다.”라고 일제의 차별 대우에 대한 비판의식을 나타냈다. 그해 4월 중순쯤 정오 여수읍 서정 자택에서 여수우편국 간이보험 모집인 송원홍(松原弘) 등에게 “조선인은 매일 열심히 일해도 급료는 적고 지위도 보장되지 않는다. 더러운 세상이다.”라고 일제 강점의 현실을 비판하였다.

김초암은 1942년 5월 1일 종방 전남공장 직공으로 들어가서 일하던 중 조선인 징병제도가 실시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큰 불만을 나타냈는데, 『조광』 5월호에 이창수의 「몽상의 제2전선」이라는 기사를 읽고 징병제에 대하여 더욱 혐오감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 5월 30일쯤 종방 전남공장의 기숙사 사감 강동조부가 징병제도에 대한 감상문을 쓰라고 하자 다음 날인 31일 오후 7시께 기숙사에서 ‘화춘대남’이라는 가명으로 “아! 하늘이시어 우리 조선 민족에게 무슨 죄가 있기에 일본과 합병된 이래 30년간 대화민족[일본]은 조선 청년의 목을 왜 요구하고 있는가? 만약 자신이 징병 검사에 합격하여 징병된다면 전장(戰場)에서 대화민족을 한 사람씩 사살할 것이다.”라고 작성하여 이를 사람들 왕래가 빈번한 기숙사 사감의 책상 위에 놓아 둠으로써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징병제도를 비판하였다. 김초암은 이 일로 인하여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징역 10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김초암은 아버지를 따라 어업에 종사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이후 아버지가 병이 들자 가족의 생계를 위해 공성정미소[1960년 폐업]에서 일하던 중 1958년 7월 기계실의 고장 난 전기 장치를 고치다가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김초암의 공훈을 기리어 2011년 3월 1일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공훈전자사료관(http://e-gonghun.mpva.go.kr)
  • 여수지역독립운동가유족회(https://blog.naver.com/hong9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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