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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31331
한자 洪淳鳳妻利川徐氏孝烈碑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비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상암로 478[호명동 502-2]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유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925년 9월 20일연표보기 - 홍순봉 처 이천서씨 효열비 건립
현 소재지 홍순봉 처 이천서씨 효열비 - 전라남도 여수시 상암로 478[호명동 502-2]지도보기
성격 효열비
관련 인물 홍순봉|이천서씨|오준선|고광선
재질 화강암
크기(높이, 너비, 두께) 183㎝[총 높이]|142㎝[비석 높이]|45㎝[너비]|18㎝[두께]

[정의]

전라남도 여수시 호명동에 있는 일제 강점기 세워진 홍순봉의 처 이천서씨 효열비.

[개설]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할아버지는 서천로(徐千老), 아버지는 서용백(徐龍伯)이고, 남편은 홍순봉(洪淳鳳)으로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건립 경위]

서씨 부인의 손자 홍성규(洪性奎)와 증손자 홍연의(洪淵義)가 할머니의 효열을 본받기 위하여 홍순봉 처 이천서씨 효열비(洪淳鳳妻利川徐氏孝烈碑)를 건립하였다.

[위치]

홍순봉 처 이천서씨 효열비전라남도 여수시 상암로 478[호명동 502-2]에 서 있다.

[형태]

효열각 내에 비신과 비갓이 있으며, 재질은 화강암이다. 총 높이는 183㎝이며, 비석 높이는 142㎝, 너비는 45㎝, 두께는 18㎝이다.

[금석문]

비신 전면 중앙에는 ‘홍순봉 처 이천서씨 효열비(洪淳鳳妻利川徐氏孝烈碑)’라고 쓰여 있다.

후면에는 “세상의 많은 이들이 남편의 죽음을 따라 죽음으로 열부라 하나, 그러나 어찌 반드시 목숨을 끊음으로써 열이라 할 것인가? 성인이 가로되 부인이 세 가지 따라야 할 의가 있다 하니 몸이 죽도록 의를 지켜 시부모 봉양을 효로써 하며 어린 자식을 법으로써 가르쳐 가계를 일으켜 세워 망부의 마치지 못한 뜻을 위로함이 그 온갖 어려움과 빛나는 의열이 어찌 갑자기 명을 판단한 것에 백배나 어렵지 않으리오? 이것이 그 열이라 하는 바라. 옛적에 유인 서씨의 효와 열이 세상 사람에게 뛰어남이 심히 먼지라. 그러므로서 더욱 오래토록 더욱 송모하는 바라. 삼가 살피건대 서씨는 이천군의 먼 후손이요, 용백은 그의 아버지요, 천로는 그의 조부니라. 아직 어려서 예도가 이뤘더니 출가함에 홍순봉의 처가 되니 홍씨는 남양의 명망 있는 집안으로 여조태사은 열의 후손이요 문정공 언박이 그 현조다. 한번 남편 집에 들어와 시부모께 효도하고 남편을 공경하여 이웃 마을에서 칭찬하고 감탄한 바 되었더니 불행히 갑오 3월 26일에 남편 상을 당하니 유인이 밤낮으로 피눈물을 흘려 따라 죽으려 맹세하다가 집안의 노소가 백단으로 널리 깨우치니 이윽고 문득 시사로 깨우쳐 가로되 시부모가 병으로 자리에 누우니 봉양할 사람이 없고 어린애는 고고히 울며 품안에 있으니 누가 능히 기를 것인가 하여 드디어 힘을 내고 억지로 죽을 먹어 장례 절차를 유감없이 하고 집이 가난하여 길쌈으로 생계를 꾸려 맛있는 음식을 바침으로써 자식을 잃는 시부모로 하여금 그 슬픔을 잊게 하고 시부모가 이질에 걸리자 똥을 맛보아 증세를 시험하고 시아버지가 고기를 드시고 싶어 하니 시장이 멀어 이루기 어려운지라. 바야흐로 걱정하던 차에 문득 집의 개가 옷을 잡아당겨 사람에게 알리려는 것과 같거늘 집 뒤 대밭으로 따라 들어가니 과연 노루 새끼 한 마리 있는지라. 급히 잡아서 삶아 바치니 또한 효성의 감동으로 이룬 바라. 정유년에 시어머니 상을 만나고 기해년에 연이어 시아버지 상을 당하여 슬픔이 예도를 지나치고 전후 상을 당함에 어육을 입에 가까이 않은 지가 무릇 9년이라. 지극한 효열의 행실이 아니고야 능히 이같이 하랴? 마침내 두 아들을 가르쳐 집안을 성립하니 죽은 남편의 뜻을 마음 삼음을 가히 볼지로다. 당시 마을에서 그 지극한 행실에 감동하여 장차 현도에 천거하려 할새[世多以夫死下從為烈婦然古何嘗必以致命為烈哉聖人曰夫人有三從之義沒身守義養舅姑以孝教幼兒有法成立家計以慰亡夫未卒之志者其百罹艱貞炳義烈 豈不百倍於倉卒辦命哉此其所以為烈也若古孺人徐氏之孝之烈出世人遠甚鄉人士之所以愈久而愈頌慕者也謹按徐氏利川君之遠裔而千老其考諱年未笄禮度己成許嫁為士人洪淳鳳妻洪氏南陽望族皇朝太師殷悦之后文正公彥博其顯祖一入夫家孝舅姑敬君子為隣里所稱歎不幸甲午三月二十六日奄喪所天孺人日夜泣血矢以下從一家老少百端寬譬之既旣而幡然自解曰舅姑病委床褥奉養無人幼稚呱呱在懷誰能鞠育遂强加餐饗粥送終之節俾無遺憾家貧而織雞絍資生以供甘旨使失子之舅姑忘其哀舅姑委痢獲嘗糞驗證舅思肉味市遠難致方憂煌悶迫之際忽家犬牽衣若有告者隨入家後竹田果有一兒獐急取而煮進亦孝感所致也丁酉遭姑喪己亥連遭舅喪哀戚過禮前後居喪魚肉不近口者几九年非至孝烈行能如是乎終能教訓二子成立門戶心亡夫之心可見矣當時鄉里感其至行將欲薦聞縣道]”라고 쓰여 있다.

또한 우측면에는 “부인이 이것을 듣고 아들과 조카를 불러 훈계하여 이르기를 나는 미망인으로써 매양 분수 다하지 못함을 한하거늘 또한 감히 천포하여 오죄를 거듭하게 하느냐? 하니 이로 말미암아 정지하였으나 지금의 천장은 다 부인이 돌아가신 뒤니라. 장하도다! 옛사람은 뜻이 깊고 먼 고로 절의로써 소중함을 삼고 후세 사람은 뜻이 좁은 고로 사생으로써 소중함을 삼은지라. 서씨 같은 효열은 마땅히 옛사람 중에서 구할 것이요, 오는 백세의 사람으로 절개를 잡고 의를 지키는 어진 부인임을 알게 함이라. 이와 같이 탁이한 행실은 정포의 법이 있어야 마땅하나 그때가 아닌지라. 바야흐로 비를 세워 사적을 기록하려 할 때 손자 성규 증손 연의가 글을 나에게 청하거늘 내 노쇠함으로써 감히 명을 따르지 못한다고 사양하다가 친구 김석혁이 그 마을에 있어 곁에서 재촉하므로[夫人聞之招子侄之諭日吾以未亡人每恨不能盡分又敢薦褒以重五罪耶由是停止今之薦狀皆夫人為後也鳴呼古人志慮深遠故以節義為重後世志慮迫狹故以死生為重若徐氏孝烈當於古人中求有來百世人知為秉節守義之賢夫人也以若卓異之行宜蒙在衰之典而非其時也方欲立碑紀蹟而孫性奎會孫淵義過文于余余辭以衰朽不敢承命而交人金碩赫以其鄉里在傍敦迫遂就其薦]”라고 쓰여 있고, 좌측면에는 “드디어 그 천장의 말에 따라 약간 간추려 하여금 돌아가 새기게 하노라. 을축년 음력 7월. 금성 오준선 짓고 장흥 고광선 쓰다[狀於略加删潤俾歸刻焉 旃蒙赤奮梧秋日 錦城 吳駿善 撰 長興 高光善 書]”라고 쓰여 있다.

[현황]

2022년 6월 현재 홍순봉 처 이천서씨 효열비는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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