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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전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3A040201
지역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안도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병호

부산에 살고 있던 이춘송이 1950년 8월 3일 전라남도 여수시 남면 안도리 안도 이야포에서 있었던 미군 전투기의 기총 소사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을 증언함으로써 그 동안 누구에게도 말 못하고 가슴에 담고만 있어야 했던 가슴 아픈 이야기가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증언자의 부모와 두 동생을 포함한 140~150여 명의 민간인이 이 사건으로 희생되었는데, 증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 가족은 일곱 식구로 6·25사변이 일어나자 월남하여 서울 마포구 염리동에 설치된 피난민촌에 있다가 부산시 부산진구 성남초등학교에 집결하여 일주일간 머물렀다. 1950년 7월 21일쯤 같이 수용되어 있던 350명의 피난민들은 부산 연안부두에서 여객선을 타고 출항하여 경상남도 충무에 있는 충무초등학교에 수용되었다.

1950년 7월 27일쯤 충무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쌀을 배급받고 오후 2시쯤에 다른 화물선(목선)을 타고 욕지도에 입항하여 약 5일간 학교 시설에 수용되었다. 1950년 8월 2일 저녁 무렵, 여수시 남면 안도리 이야포에 정박하여 배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3일 아침 아버지가 안도에 상륙하여 손수 지어오신 밥을 먹을 수 있었다.

1950년 8월 3일(음력 6월 21일) 아침 9~10시쯤, 미 공군 제25전투비행단 소속 F80 슈팅스타로 추정되는 미군 전투기 1개 편대 가운데 1대가 2발을 발사한 것을 신호로 4대의 전투기가 배를 돌면서 기총 사격을 시작했다. 배에 태극기가 달려 있었음에도 사격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 사격으로 인해 아버지와 여동생은 총상을 입고 배 위에서 바다로 떨어져 숨지고, 어머니와 남동생은 구명보트를 타고 가다 보트가 뒤집혀 돌아가셨다.

열두 살이었던 나는 배에 있던 물통 뒤에 숨어서 사격 현장을 볼 수 있었는데, 왼쪽 오른쪽 할 것 없이 한쪽에서 7~8명씩 배 안과 밖으로 쓰러져 갔다. 미군 전투기는 다시 돌아와 탈출하는 배에까지 사격했으며, 총탄이 배에 맞지 않고 물에 맞으면 탄흔이 물보라를 일으켜 분수처럼 튀어 올라 옷을 흠뻑 적셨다. 주위에는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신음과 아우성이 하늘을 찔렀다.

선장실 위에도 많은 사람이 쓰러졌는데, 17~18세쯤 되는 한 청년은 양쪽 엉덩이 살이 다 떨어져나간 채 무의식적으로 계단을 잡고 내려오고 있었고, 내 앞에는 나에게 약을 주었던 고마운 부인이 팔과 볼에 총을 맞고 배 난간에 기대어 흐르는 피를 수건으로 막고 있었다. 배 안에는 미처 올라오지 못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고, 이미 죽은 어떤 아주머니 위에는 애처롭게 젖을 물고 있는 어린 아이도 있었다.

형과 나는 재빨리 육지로 올라와 수수밭에 숨어서 살펴보니, 다른 사람들은 산속으로 숨어 보이지 않았다. 형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찾으러 자갈밭으로 달려갔다가 잠시 후 울면서 돌아왔다. 자갈밭으로 가보니 어머니는 입에 거품을 물고 돌아가셨고, 동생은 어느 집 뒤 나뭇단 위에 상반신이 시퍼렇게 되어 죽어 있었다. 나는 동생을 안아 어머니 옆에 고이 뉘이고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

그때까지 우리 형제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을 모르고 몇 시간이나 맨발로 산 속을 헤매며 ‘아버지’를 외쳤다. 아버지를 못 찾은 형은 어둠을 틈타 몇몇 사람과 함께 줄을 잡고 배에 가서 총에 맞은 냄비 한 개와 쌀 그리고 짐꾸러미를 찾아 왔다. 우리는 동쪽 산에서 하룻밤을 뜬눈으로 지새우고, 다음날 아침 서쪽 산 위로 가서 우리보다 키가 조금 큰 소나무 밑에 숨었다.

다음날 아침 동네 상황을 살펴보니 이 섬은 인민군이 아직 점령하지 않은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그렇게 나무숲에 숨어 지내는 2~3일째 되는 날 아침, 또 다시 전투기 한 대가 정찰을 하러 산 위에서 배를 향해 지나갔다. 하루는 미군 전투기가 바닷가 집 뒤를 돌아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살펴보니 널빤지 위에 이미 총탄을 많이 맞아 온몸의 살이 파헤쳐져 피로 멍든 35세쯤 되는 청년이 신음하며 죽어가고 있었다. 이 청년은 엉덩이가 파헤쳐져 사람한테 업힌 상태였으며, 상처에는 호박이 붙여져 있었다.

안도에 도착한 5~6일째 되는 날, 군복 입은 사람들이 탄 배가 오더니 사람들에게 기총 소사로 죽은 사람들을 배에 실으라고 명령한 뒤 불을 질렀다. 해질 무렵 우리는 몇몇 사람들과 함께 불길과 연기가 하늘 높이 올라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배 안에서 어머니가 죽은 줄도 모른 채 젖을 물고 있던 갓난아이도 기어이 죽고 말았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그곳으로부터 2㎞ 떨어진 소리도의 산에 손으로 흙을 파서 흙과 돌로 파묻으면서 슬피 통곡했다.

작은 마을 소리도의 초등학교에 가서 잠을 자고 나니, 먼저 온 사람은 약 200명 안팎이었다. 나머지 140~150명은 그 배에서 죽었으며, 소리도 산 속의 갓난아이만 유일하게 땅에 묻혔다. 그 학교에는 여수에서 왔다는 경찰관 약 200명 정도가 같이 있었다.”

사고 당시를 경험한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1차 기총 사격이 끝난 후 마을사람들이 부상당한 피난민들을 구하기 위해 현장으로 달려가 한참 구조작업을 하고 있을 때 또 다시 미군기가 나타나 기총 사격을 함으로써 마을사람들 가운데에서도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열한 살의 나이로 안도 이야포 학살 현장에서 살아남아 미국으로 건너간 뒤 워싱턴 한인회장까지 지낸 윤학제는 섬에서 자신처럼 가족을 잃은 소녀에 대한 기억을 회상하는 수필집을 냈는데, 당시 희생자를 300여 명으로 밝히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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